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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뭇잎 Nov 11. 2022

청춘에겐 잘못이 없다

수능 100일 전, 친구들과 작은 방에 모였다. 케이크에 촛불을 켜놓고 각자의 소원을 빌었다.

“○○ 대학 가게 해주세요.”

“제발 재수만 하지 않게 해주세요.”

“수능 당일 내가 아는 것만 문제로 나오게 해주세요.”

내 소원은 친구들과 달랐다. 

“내년에는 꼭 서울 거리를 걷게 해주세요.”

나의 소원은 고향 대구를 떠나 서울 어느 한 거리를 걷는 것이었다. 이왕이면 네온사인의 반짝이는 불빛 속에서 많은 사람과 어깨를 부딪치며 걸어야 할 만큼 번화한 곳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령, 명동이나 신촌 같은 곳. 나는 아빠와의 잦은 마찰로 혹독한 사춘기를 보내고 있었다. 내가 고3 수험생이 되면서 우리 집 분위기는 더 살벌해졌다. 아빠와 나 사이에서 큰 소리가 언제 날지 몰라 다른 가족은 불안해했다. 엄격한 집에서 벗어나 서울에서 자유롭게 지내는 것이 나의 소원이었다. 더불어 엄마와 동생의 바람도 내가 집을 떠나 아빠와 떨어져 사는 것이었다. 그래야, 집 안의 평화가 온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1997년엔 꼭 서울에서!”라고 다짐했어도 막상 기차에서 내려 서울역 앞에 서니 막막했다. 난 경상도 남쪽에서 올라온 아무것도 모르는 19세 소녀에 불과했다.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시골 촌년. 드라마에서 봄 직한 높다란 건물 앞에서 주눅이 든 소녀 말이다. 알록달록한 색으로 표시된 지하철 노선도를 보며 1호선에서 4호선으로, 2호선에서 3호선으로 갈아타는 이들은 모두 똑똑하게 보였다. 빠르게 갈아탈 수 있는 지점을 척척 알아 계단,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내리는 사람들이 모두 대단하게 보였다. 에스컬레이터 위에서조차 뛰는 서울 사람들. 그들의 용무는 참 바쁜가 했다. 역시 대도시는 뭔가 달라도 달라. 서울에서 지내게 되면 가보고 싶은 곳이 많았다. 거리 공연이 낭만적으로 보였던 대학로, 친구가 방학에 가보았다며 자랑했던 63빌딩의 여의도, 버거킹마저 외국에 온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이태원, 뉴스에서만 볼 수 있는 큰 성당이 있는 명동. 가고 싶은 곳의 장소를 수첩에 적어 내려갔다. 내가 아는 유명한 곳만 적어도 10곳이 넘었다. 대구에서는 ‘시내에서 만나!’라고 약속하면 으레 떠오르는 곳은 한 곳뿐이었는데. 


밀레니엄의 해라며 온 세계가 들썩하던 그때. 한 해를 보내는 제야의 종소리와 새해를 맞이하는 열기를 현장에서 느끼고 싶었다. 1999년 12월 31일, 종각에서 친구와 만나기로 했다. 애초 계획은 세 명이었으나 친구가 또 다른 친구를 부르고, 선배도 합류하고 싶다고 하여 7명이 되었다. 숫자에 불과하지만 한 해의 앞자리 숫자가 바뀌면 새로운 시대가 올 것만 같았다. 2000년 1월 1일의 종소리를 기대하며 종로 3가에서 종각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우리의 계획을 스스로 칭찬했다. 자취방에서 맞이하는 새해는 시시하지 않냐며. 새해가 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일은 얼마나 멋지냐며. 지금까지 보냈던 어떤 연말보다 훨씬 좋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주변에 사람이 많아졌다. 뒤에서부터 밀리는 느낌이 나더니 우르르 도미노처럼 넘어졌다. 앞사람이 넘어진 후 나도 같이 걸려서 쓰러졌다. 뒷사람이 일어나기만 기다리며 중간에 끼어 있었다. 같이 갔던 친구가 주변 사람들에게 “여기 사람이 넘어져서 못 일어나는데 계속 밀면 어떡해요!”라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모르는 사람의 손을 잡았다. 맞잡은 두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내 몸은 끌어 올려졌다. 순식간에 나를 눌렀던 뒷사람도 일어났고, 내 앞에 깔려있던 사람도 “살았다!”라며 무릎을 털었다. 넘어진 것도 순식간이었고, 일어날 수 있었던 것도 순간이었다. 나에게 손을 내밀었던 한 사람의 빠른 판단이 더 이상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했다. 막상 한 사람이 일어나기 시작하니 주변 정리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연스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이 생겼다. 우리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종각에서 시청으로, 시청에서 광화문까지 걸었다. 광화문대로 한복판에 발을 딛자 온 하늘이 빛이 났다. 하늘의 조물주가 세상의 사람에게 선물이라도 주듯, 색종이 조각이 바람에 휘날리며 땅을 덮었다. 대형건물 유리창에 켜진 형광등, 오색찬란한 간판, 사람들 손에 들고 있던 LED 양초의 빛을 받으니 세종문화회관이 커다란 보석처럼 보였다. 가끔 친구와 만나면 그때 이야기를 한다. “우리 30년 후에 여기서 또 만나자고 했잖아.” 그날의 기억은 곱게 내 마음에 남아있다. 오직 서울이라는 곳에 가고자 했던 10대 소녀의 꿈처럼. 오래전의 나처럼 누군가는 기대하는 즐거운 마음만으로 이태원에 갔을 수도 있다. 그들도 살면서 가끔 꺼내고 싶은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고 싶지 않았을까. 2022년 10월 29일, 일상을 살기 위해 외출했을 뿐인데 그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10.29 참사 희생자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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