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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뭇잎 Nov 28. 2022

스무 살의 골목

스무 살, 명동에서 자주 동아리 모임을 했다. 11월, 영하의 날씨는 아니었지만 두꺼운 외투를 걸치지 않으면 몸이 움츠려지던 제법 쌀쌀한 금요일이기도 했다. 그냥 헤어지기엔 조금 아쉬웠는지 한 선배가 남산을 거쳐 한남동까지 걸어가 보자고 했다. 평소 자주 타던 83-1번 버스로 정류장 몇 개만 거치면 되니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나만 그렇게 여겼던 건 아니었는지, 걷기 시작한 지 20분이 지나자 조심스럽게 한마디씩 했다.

“아직 남산까지 가지도 못했는데 20분도 더 지났어.”

“금방 도착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반도 못 왔잖아.”

“오르막길 지나고 다시 내려가야 한남동이 나오는 거 아냐?”

서울역 맞은편 언저리에서 출발하면 남산까지는 오르막길만 이어진다. 다시 꼬불꼬불 내리막길을 한참 더 내려와야만 한남동이 있었다. 유유히 창밖 풍경 보며 버스 타고 다니면 금방이었는데, 걷기 시작하니 만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한참을 걷고 또 걸어 겨우 도착한 한남동. 다들 기운 넘치던 스무 살 초반이었는데도 힘들다고 투덜거렸다. 그러면서, 누구 하나 중간에 버스 타고 가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왕 걷기 시작한 것이니 끝은 봐야 한다는 심정이었다. 드디어 한남동 서울은행 앞에 도착했다. 몸이 노곤하여 따뜻한 방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싶었다. 방석 깔고 앉아서 알코올로 목을 축이기에 적당한 한남동 술집 골목에 들어섰다. 파란색, 회색 대문의 주택가에 드르륵 옆으로 밀던 문이 있던 술집들. 골목의 이름은 개골목이었다. 술 마신 후 나갈 땐 개가 되어서 나간다던 개골목. 믿거나 말거나. 홍능집이었나 마포집이었나, 은색 철제문에 궁서체로 ‘닭도리탕’이라고 큼직만하게 글씨를 쓴 곳에 들어갔다. 골목의 유래를 선배들이 이야기하며 잔을 채웠다. 얼큰한 닭볶음탕과 알싸한 소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다행히 모두 네 발이 아닌 두 발로 걸어 나왔다.     


마흔다섯, 오랫동안 연락 못 했던 이들에게 문자를 보낼 일이 생겼다. 핸드폰을 뒤져 후배 한 명에게 아빠의 부고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사는 게 바쁘다며 전화 한 통 못했는데, 갑자기 연락하려니 머뭇거려졌다. 선후배들은 혼자 또는 두셋 짝을 지어 장례식에 왔다. 갑작스레 맞닥뜨린 아빠의 죽음 앞에서 넋 놓고 있는 내 등을 두드려줬다. 어려운 일에 함께 해줘서 고마웠다. 그 와중에 오지 못한 지인의 얼굴이 떠올라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챙기지 못한 그들의 경조사가 빠르게 떠오르며 부끄러워졌다. 난 못 받은 것만 기억하는 못난 사람이었구나. 나도 못 한 게 이리도 많은데, 누굴 원망하고 탓한 건지. 내가 인생을 잘못 산 게 아닐까 생각하다가도 고마운 얼굴을 떠올리면 괜찮게 지낸 것 같다는 안도의 마음이 들었다.      

선배들, 늦은 시간이었는데 와줘서 고마워요.

H에게, 그날, 같이 소주를 못 마셨네. 20살 때 같이 마시던 실내포장마차가 생각나더라.

D에게, 두 아이 키우느라 힘들지. 육아 터널 잘 지나가 보자.

W에게, 삼 남매 키우느라 등골이 휘겠구나. 그래도 귀엽지?

또 다른 H에게, 장인어른 부고를 전해 듣고도 못 가봐서 미안해. 내가 뭘 하고 사는지. 

C에게, 멀리 못 가봐서 미안하다고 문자를 남겼더라. 괜찮아, 이해한다.


이젠 서울에서 손꼽히는 초고가 집값의 주택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무한 리필 계란말이 기름 냄새가 진동하던 개골목은 사라졌다. 개골목에서 만났던 그대들도 학생에서 40대 가장이 되었다. “니, 택시비 있나? 없으면 지금 차 타러 가야 하는데.” 뜨문뜨문 오던 국철의 시간표를 보며 마지막 잔을 급하게 털어 넣고선 막 달렸다. 함께 뛰던 친구가 있어 스무 살의 개골목에선 외롭지 않았다. 그들에게 더 늦기 전에 인사를 건네려 한다. 직장에서 상사 눈치 보느라, 후배 앞에서 꼰대 안되기 위해 노력하느라, 집에서는 가장 역할 해야지, 아이들에게 좋은 부모 되어야 하니 참 힘들지. 1년에 한두 번 보기도 어렵지만. 이게 다 사는 일이고, 거쳐야 할 인생 여정이라면, 우리 잘 이겨내 보자. 인생의 한 부분을 같이 해줘서 고마워.      

그대들이 나에겐 히어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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