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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뭇잎 Jan 22. 2023

늦어버린 친절

“젊은 부부가 내가 들고 있는 약간의 무게가 있는 비닐봉지를 대신 들어줬다. 봉투에 고구마와 상추가 들어 있는 걸 보고서 말이다. 마침 아파트 같은 동에 사는 터라 다행이었다. 친절을 나에게 베풀어줘서 참으로 고마웠다.” <2021년 3월 27일 아빠의 일기장에서>


‘일상과 에세이’ 특강을 듣기 위해 집을 나섰다. 여러 노선이 지나가는 김포공항역은 생각대로 복잡했다. 5호선, 9호선, 공항선, 김포 골드선의 안내 방향을 한 번 보고 핸드폰 화면 한 번 보면서 9호선을 갈아탔다. 복잡한 역사와 달리 개화역으로 향하는 9호선 전철에는 사람이 없었다. 한 칸 통째로 텅텅 빈 것이 아닌가. 출근 시간이 살짝 지나서 그런가 보다 했다. 여유 있어서 좋네 싶다가도 혹시 잘못 탄 게 아닌가 하여 다시 핸드폰으로 ‘길 찾기’를 검색해봤다. 몇 번이고 손가락으로 다시 화면을 키워 경로를 확인했다.     


나 같은 이가 또 한 명 있었다. 사람을 붙잡고 뭔가 물어보고 싶은 표정이었다. 나를 발견하곤 반가운 기색을 보이며 다가왔다. 등이 굽은 어르신이었다. 문득, 돌아가신 아빠가 떠올랐다. 178cm 아빠의 작지 않은 키는 75세가 지나면서 170cm 언저리로 보였다. 평생을 새벽 4시에 일어나 책상 앞에서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아빠의 넓은 등판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손에 쥔 모래가 바람에 흩날리듯, 아빠의 몸에서 반짝이던 젊음과 등등한 기세는 신기루처럼 빠져나가 앙상한 뼈만 남았다. 아빠는 자신을 노인으로 보는 우리의 눈빛과 몸짓을 모두 싫어했다. 자식한테 혹시라도 도움받을 일이 생기기 전에, 민폐라고 생각되는 상황을 만들기 싫어 재빨리 혼자서 모든 걸 처리했다. 가령, 대학병원 진료 시간에 맞춰서 데리러 가면 아빠는 집에 없었다. 우리가 도착하기 한 두 시간 전에 집을 나서 혼자서 지하철, 버스 타고 다니던 아빠. 아빠가 갑작스레 우리 곁을 떠난 후 지하철에서 어르신을 보면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이 차 개화역 가는 거 맞아요?”

“네, 맞는 것 같아요. 저도 처음이지만요.”

입은 이렇게 말했지만 동시에 어르신이 들고 있는 핸드폰 화면에 눈이 갔다. ‘개화’를 이야기했지만 어르신 손가락은 5호선 ‘개화산’역을 가리키고 있었다. “잘 못 타셨어요.”

친구가 기다리고 있어 마음이 급해 김포공항역에서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다는 어르신은 난감한 표정을 보였다. “여기는 9호선 개화예요. 여기가 종착역이니 김포공항으로 다시 돌아가 5호선으로 갈아타세요. 꼭 5호선인지 물어본 후 타셔야 해요. 개화산역에서 내리세요.” 개화와 개화산역에 특히나 힘을 주어 말했다. 특강 시간에 늦을 것 같았지만 어르신이 다시 김포공항역까지 돌아가는 차를 타는 걸 보고 내 걸음을 재촉했다.


‘일상과 에세이’ 특강, 10분 글쓰기 시간의 주제는 ‘오늘 아침의 풍경’이었다. 우리 아빠에게는 표현하지 못한 마음을 어르신에게 전하고 싶었던 아침이 떠올랐다. 공책에 적어 내려갔다. 아빠에겐 보여줄 수 없을 만큼 늦어버렸지만. 아빠의 일기장에 남아 있는 무거운 짐을 들어준 젊은 부부의 짧고도 작은 친절도 함께 썼다. 강렬한 자국을 남긴 서너 줄의 일기를 가슴에 내내 품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마음 한 자락과 자리 한쪽을 내어주는 일은 ‘오늘’ 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중도 아니고, 내일도 아닌 지금. 몸이 무거워 지하철 빈자리에 털썩 앉고 싶은 날에도, 이제야 어르신의 작은 체구와 피곤한 눈빛을 본체만체하지 않는다. 우리 아빠가 다시 내 곁에 올 것 같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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