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뭇잎 Jan 30. 2023

아빠의 주례사

아빠는 젊은 시절부터 유달리 흰 머리가 빨리 났다. 60세가 되면서 백발이 된 우리 아빠는 일생에 단 한 번, 염색했는데 그날이 바로 나의 결혼식 날이었다. 늙어 보이니 염색 좀 하라고 엄마가 몇 번을 말해도 듣지 않던 아빠였는데 결혼식 하루 전, 까맣게 염색하고 와서 주변을 놀라게 했다. 말없이 외출한 후 돌아와서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그냥 했다!"라고 딱 한 마디만 했다. 평소 아빠의 방식이었다.


2009년 10월, 결혼을 준비하면서 구태의연한 주례사는 생략했으면 했다. 양가 부모님의 축하와 덕담을 듣고 싶었다. 자식이 부모를 떠나 배우자를 맞이하며 진정한 독립을 하는 날, 자녀에게 직접 목소리로 전하는 당부가 의미 있을 것이라 믿었다. "꼭! 짧게! 짧아야 해요."를 강조하는 말도 잊지 않았다. 좋은 말도 길면 힘들어지는 법이니까.     


"오늘 두 사람은 새로이 태어났습니다. 사람은 두 번 태어납니다. 한 번은 부모로부터 태어나고 다른 한 번은 결혼으로 남편과 아내로 태어납니다. 탄생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사랑과 고통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서로 줄을 잡아당기면서 가까이 다가가듯이 고통이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결혼 생활은 나와 너라는 존재가 우리로 태어나서 하나로 완성해나가는 과정입니다. 사랑과 믿음, 감사, 이해라는 주춧돌 위에 행복이라는 집을 짓고 사세요. 하늘이 맺어준 끈을 사람의 손으로 끊을 수 없다는 성경의 말씀을 항상 새기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결혼하면서 부모님을 떠나는 것이 슬퍼 흰 장갑 끝으로 터져 나오는 눈물을 손으로 꾹꾹 눌렀다. 참다못해 콧물도 훌쩍였다. 아, 눈물 콧물 참고 있을 때 아빠의 이야기가 끝이 났으면 좋았을 텐데. 극에 다다른 감정이 '피식'하고 식을 만큼 아빠의 말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미안하고 슬픈 감정은 어느새 잊고 하객의 반응이 신경 쓰였다. 계획한 건 주례 없는 결혼식이었지만, 아빠의 긴 주례사를 듣게 되었다. 초조해진 나는 아빠에게 끊어달라는 텔레파시를 계속 보냈지만, 아빠는 알아채지 못했다. 급기야 다른 이에게는 보이지 않게 한 손으로 ‘커트’하는 몸짓을 하고 눈을 흘기고 말았다.


2021년 5월, 아빠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주례사 원고를 보게 되었다. 양가에 하나씩 드렸던 결혼앨범 속에 고이 담겨 있던 원고지 4장. 결혼하는 우리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담겨 있었다. 12년 전에 놓쳤던 문구가 새로이 눈에 들어왔다. “인생의 모든 고난은 언젠가는 끝이 나고 출구가 있습니다. 고통을 이기면 더 밝고 행복한 삶이 기다립니다. 캄캄한 밤이 있어야 새벽의 하늘이 열린다는 말을 믿으세요. 항상 희망과 꿈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막 부부가 되어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30대 초반의 나에게는 이런 말들이 하나도 와닿지 않았었다. 마흔을 훌쩍 넘긴 이제야 아빠의 따뜻한 당부가 눈에 들어왔다. 아빠는 부모 곁을 떠나 가정을 꾸리려는 딸에게 좋은 말을 들려주고 싶었네. 사랑에 대해서도 말해야 하고, 고난에 대해서도 알려 주고 싶고, 놓치지 말아야 할 꿈도 강조해야겠고. 그래서, 길어졌던 거였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예고 없이 맞은 아빠와의 이별, 엄마의 항암 치료가 마음을 힘들게 한 적이 있었다. 어려운 시간도 언젠가는 끝이 나고 출구가 있다는 아빠의 말을 가끔 떠올려보았다. 인생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는 마음에 더해진 아빠의 걱정. 몇십 년을 먼저 산 아빠가 인생은 꼭 평탄하지만은 않으니, 할 수만 있다면 어려움은 덜어주고 싶은 마음이었으리라. 아빠의 주례사는 나에 대한 돌봄이었다. 인생의 중간쯤 온 딸이 다시 아빠를 그려본다.     


  

작가의 이전글 늦어버린 친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