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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뭇잎 Feb 05. 2023

우리 새언니, 유지영

  그녀와 나는 97학번 동기로 만났다. 나이는 그녀가 한 살 더 많았다. 우리가 만난 곳은 서울 중구 명동 10길 전·진·상 교육관이었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겨간 계성초등학교 후문 앞, 명동칼국수가 있는 골목 끝, 성당을 다니는 신자들이 작은 행사나 교육을 진행할 때 많이 이용하는 곳이었다. 그곳은 기숙사이기도 했다. 3층부터는 여러 대학을 다니고 있는 여학생이 머물고 있었다. 늦은 시간까지 명동 작은 골목은 붐볐고, 상점은 느지막이 문을 닫았다. 가게 직원이 상점 셔터를 드르륵 소리를 내며 내릴 때쯤, 우리는 기숙사 통금 시간을 맞추기 위해 전속력으로 뛰었다.


  그녀와 나, 둘 다 잠이 많았다. 우리 부모님은 걱정도 비슷했다. 딸이 깊이 잠들면 불이 나도 일어나지 못할까 전전긍긍했다. 각자의 룸메이트는 친구 집에서 기거하며 기숙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룸메이트처럼 기숙사에서 붙어 지냈다. 좁은 싱글 철제 침대에서 맛동산 과자 봉지를 펼쳐놓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교에 가지 않는 주말이면 명동을 누볐고, 기숙사에 들어오면 피곤하다며 좁은 한 침대에서 잠을 잤다. 묵직한 솜이불 아래, 우린 추위에 덜덜 떨었다. 시험 기간에 둘 다 잠을 이기지 못해 졸다 눈뜨다 하면서 난로에 옷을 태웠던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서울이란 낯선 도시에서 서로 의지하며 20대를 보냈다. 학교를 졸업한 후 직장을 잡고, 각자의 삶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서른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녀와 나는 가족이 되었다. 친한 친구로 오랜 세월 보냈지만, 당최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인연이란 어디서 어떻게 이어질지 모르는 일이라더니. 내가 기숙사에서 "사촌 오빠 좀 만나고 올게"라며 주말 나들이 나갔던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때 그녀는 사촌오빠에 대해 무관심했다. 세월이 흘러 흘러 10년쯤 지나 무심히 그녀와 오빠에게 난 “한번 만나볼래?”라며 연락처를 건넸다. 둘은 봄이라는 한 계절을 함께 보내고, 깊은 여름이 오기 전에 결혼했다. 3개월 만이었다. 기숙사에 살던 그녀가 내 사촌 올케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2013년, 꿈에 그녀가 나왔다. 그때 그녀는 큰아들과 둘째 셋째 일란성 딸 쌍둥이 육아로 한창 바쁠 때였다. 오랫동안 바빠서 보지 못해 그런가 했다. 며칠 후, 나도 둘째 아니 둘째 셋째 아이가 쌍둥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아, 쌍둥이 육아를 하는 그녀가 나오는 태몽이라니.


  그냥 그 자체만으로도 예뻤고 눈부셨을 20대를 함께한 우리는 이제 40대 중반 애 셋의 엄마가 되었다. 내가 힘들고 지쳤을 때 가장 위로가 되었던 그녀가 캐나다라는 먼 곳으로 떠났다. 캐나다에서 공부하기 위해 떠나게 된 그녀가 커다란 가방에 싣고 온 많은 옷, 학용품, 책은 우리 집 세 남매의 차지가 되었다. 정말 떠나는구나.     


  늘 고마운 언니에게 내 마음을 보낸다.

언니,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못 했네. 한 번도 언니라고 못 불러주어 미안했어. 스무 살에 만나 학번으로 그냥 친구 맺었지만, 언니처럼 의지할 때가 많았어. '새언니'의 타이틀도 모른 척, 슬쩍 말을 놓았네.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고백하는 말이야. 20대, 술이 나를 삼켰던 날, 가까스로 집에 들어와서 가방 멘 채로 쓰러지던 내가 얼마나 보기 싫었을까. 왜 그랬을까. 오빠가 술 마시고 늦게 들어왔던 어느 날, 언니는 속상한 마음에 나에게 전화를 걸었지. 듣기만 하고 속 시원하게 욕도 못한 채, 어버버 하다 끊었네. 공감 못 해 줘서 미안했어. 내가 시누이여서 그랬나 봐. 아빠는 봉안당, 엄마는 대학병원 입원실에 모시고 황망하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던 날, 언니가 우리 집에 소고깃국, 청국장, 김밥을 싸 왔을 땐 눈물 났네. 잊지 않을게. 우리 꼭 캐나다 빨간 머리 앤의 집이 있다는 거기에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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