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뭇잎 Feb 25. 2023

40년을 함께 한 돼지저금통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우리 가족은 새집으로 이사했다. 방 3개가 있는 고층 아파트는 무척 매력적이었다. 누런 장판 위에 칠해진 니스의 냄새가 채 빠지지 않은 집에서 아빠는 당신만의 공간을 마련했다. 아빠의 서재, 그곳은 책으로 가득했다. 일렬로 꽂힌 책 사이로 미처 자리를 찾지 못한 여러 권은 바닥에 아슬아슬하게 쌓아두었다. 어지러운 책장이었지만, 제법 통통한 빨간색 돼지저금통을 아빠는 손이 잘 닿는 중간 자리에 두었다. 아빠는 퇴근 후 옷을 갈아입으며 양복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냈다. ‘쨍그랑’,‘탁탁’. 동전과 동전이 부딪치는 소리. 동전이 들어갈 때의 소리와 파장은 동전의 크기만큼 다양했다. 가령 두루미가 그려져 있는 오백 원짜리 동전은 묵직하게 ‘툭’ 떨어지곤 했다. ‘저금통에 제법 돈이 많이 들었나 봐.’ 아빠가 동전을 넣는 모습을 여러 날 유심히 관찰한 나는 혼자만의 비밀을 만들기로 했다.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는 시간에 재빨리 동전을 꺼내 몰래 주머니에 넣기로. 아빠가 붙인 누런색 테이프를 곱게 떼어내고 오백 원짜리 동전을 꺼냈다. 야금야금 꺼내서 일주일 정도 모은 돈은 꽤 컸다. 초등학생이 된 나는 이제 시시하게 조그맣고 네모난 정육면체 캐러멜을 사서 먹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묵직한 돈을 가방에 넣고만 있어도 큰 부자가 된 듯했다. 완벽한 증거 인멸을 위해 맛있는 것이라도 사 먹었으면 덜 억울했을 텐데. 고이 가방에 보관하고 다니다가 엄마에게 들켰다. 파리채 자국이 손바닥에 시뻘건 두 줄로 남았다. 화로 얼굴이 울긋불긋해진 엄마가 말했다.

  "아빠가 뭔가 이상하다고. 자꾸 돼지저금통의 위치가 달라진대. 너희 아빠한테 그 말을 못 들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아빠는 나에게 저금통에 관한 말은 일절 하지 않았다.


돼지저금통을 이사할 때마다 아빠가 챙겼다. 우리 남매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아빠가 퇴직한 이후에도, 부모님이 고향을 떠나 남동생과 내가 사는 인천으로 온 이후에도 돼지저금통은 함께였다. 아빠의 장례식 후, 남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 방을 정리했어. 돼지저금통이 있는데 꽤 묵직하네. 모아서 손주들 주고 싶었나 봐. 은행에서 지폐로 바꿔서 가져다줄게.”

정리해야 할 다른 일도 많을 텐데 그러지 말고 그냥 가져다 달라고 했다. 아빠가 평생에 매일 했던 습관들이 있다. 신문 분야별로 오리고 붙여서 스크랩북 만들기,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 쓰기. 그리고 동전 모으기. 아빠의 필체로 기록을 남긴 일기장은 고민하다가 최근 5년 치만 남겼다. 5년 치의 권수도 상당하여 동생과 내가 반반 나눠서 보관하기로 했다. 스크랩북은 내용과 표지를 분리하여 재활용품과 일반쓰레기장으로 보냈다. 그렇게 하여 아빠의 유품 중 일기장과 돼지저금통만 내게 남았다.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햇살 좋았던 어느 5월의 하루가 꿈에 나타난다. 순서도 엉키지 않고 이어지는 광경이다. 신문, 옷가지. 식탁 위 과일, 그 옆에 '드세요'라고 적은 쪽지. 그리고 이어졌던 구급차, 경찰차.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것처럼 한 계절만 지난 줄 알았는데, 벌써 2년이 되어간다. 아이들에게 체크카드를 만들어 준 이후로는 동전이 생기지 않아 좀처럼 돼지저금통이 불룩해지지 않는다. 그래도 가끔 지갑에 동전이 몇 개 모이면, 일부러 돼지저금통을 찾는다. 야무지게 앙다문 저금통 입이 아빠의 입 모양을 닮은 것도 같다. 평소 말이 없던 아빠를 내가 머릿속에 그리는 동안 아이들이 동전을 넣는다. 아이들은 이걸 모아서 무얼 살지 고민하며 자기들끼리 쑥덕거린다. 최애 아이템 쿠키런, 포켓몬을 상상하며 즐거워하는 시간이다. ‘툭’ 떨어지는 동전 소리처럼 내 심장도 ‘툭’ 떨어졌던 그날. 이젠 기억도 많이 희미해져 돼지저금통을 보며 웃을 수 있다. 몇 년 후엔 돼지저금통을 보며 다른 이야기도 쓸 날을 믿으면서.                                                                                 

작가의 이전글 우리 새언니, 유지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