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들의 돌이 가까워진 어느 날, 가족사진 촬영을 예약했다.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의 사진을 예쁘게 찍어주고 싶었다.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다른 집에 가면 볼 수 있는 커다란 액자 속의 가족사진을 우리도 찍어보고 싶었다. 아빠의 반응은 예상과 같았다. “그거 뭐 할라꼬? 돈 들고 번거롭게. 너희나 찍고 오너라.”
가족 여행을 가자고 해도, 사진을 찍자고 해도, 아빠의 대답은 늘 ‘그거 뭐 하려고’ 였다. 평소 같았으면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며 아빠의 뜻을 따랐을 테지만 이번만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빠 첫 손주 돌이잖아.” 함께 찍는 첫 번째 사진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면서 손주와 사위를 앞세웠다. 마지못해 촬영을 시작하고 아빠는 사진작가가 하라는 대로 자세를 취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컴퓨터를 정리하면서 그때 그 사진을 발견했다. 가족사진 속 아빠는 웃고 있다. “그래도 아빠, 웃고 있었네.” 겉으로는 찍는 것이 번거롭다고 했지만 아주 싫지 않았나 보다. 그랬어야 했다. 싫다고 해도, 돈 든다고 걱정해도, 괜찮다며 거절해도, ‘가족 행사’라는 이름으로 여행도 가고, 사진도 찍고, 밥도 먹고 그랬어야 했다. 사무치게 후회하는 것 중의 하나는 아빠의 ‘뭐 하려고’에 당연한 듯 무심히 ‘그럼, 그렇지’라고 반응한 것이다. 엄마가 응급실을 통해 입원하고, 조직검사를 한 후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동생은 아빠한테 화를 내며 누나 집에서 며칠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빠는 싫다고 했고, 나는 동생에게 그만하라고 했다.
“아빠가 누군데, 안 오실 거다. 아빠 뜻대로 하게 둬라. 내가 며칠 왔다 갔다 하며 들여다보면 되지.” 그렇게 말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엄마는 아직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아빠가 그렇게 먼저 우리 곁을 떠날지 몰랐다. 내 새끼 챙긴다고, 내 몸 챙긴다고 아침 일찍 가지 않고 친정에 들르는 것을 미룬 것이 너무나도 후회된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만들어온 색종이 카네이션 꽃을 어버이날 전에 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오후가 되어서야 아빠를 찾았다. 서둘러 나오느라 핸드폰도 빠뜨린 채 허겁지겁 친정에 도착했다. 문 앞의 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와 다르게 그 시간까지 집 안으로 들여놓지 않은 신문이 불길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식탁 위의 과일이 그대로였다. 전날 놓았던 모습 그대로 뜯지 않은 비닐 포장과 ‘드세요’라고 내가 적은 쪽지까지. 그리고 이어졌던 구급차, 경찰차.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생경하게 느껴졌던 고요한 적막함의 기운까지 모두 사실이었다.
‘어릴 때 다른 친구의 아빠들보다 흰머리가 많다고 싫어해서 미안해.’, ‘사춘기 때 바락바락 대들었었네. 미안해.’, ‘결혼식 축사 길게 한다고 싫은 소리 했었네. 미안해.’, ‘매번 전화해서 엄마만 찾아서 미안해.’, '내가 적극적으로 우리 집에 오자고 말 못 해서 미안해.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 집으로 같이 왔어야 했는데.'
후회하는 것 중의 또 하나, 내가 나만 챙겼구나, 늙은 아버지가 잘 계신지 전화만 했어도, 내가 빨리만 갔어도, 입관하는 것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장례지도사의 말은 듣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허망하게 보내드리진 않았을 텐데. 이젠 울어도 소용없다. 결과는 돌릴 수 없고, 아빠는 오지 않는다. 다들 내 탓이 아니니 괜찮다고 했다. 그만하면 편안히 잘 가신 것이라고 했다. 틀린 말인 것 같지만 ‘그래, 맞아’라고 했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니까. 내가 덜 울어야 엄마도 마음 안 아플 테니까. 사랑을 주는 일도, 사랑을 표현하는 일도 그때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또 후회한다. 미루지 말았어야 했다. 아빠, 늦어서 죄송해요. 하늘에서 뵈면 그땐 나중으로 미루지 않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