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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뭇잎 Aug 13. 2022

친절 천사의 가르침


2002년 6월, 우리나라는 월드컵 열기로 뜨거웠다.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을 차례로 꺾고 4위라는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결과를 냈다. 국민은 하나가 된 듯이 함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뜨거운 열기가 가실 때쯤, 늘 그리워했던 인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우리나라 7월은 연신 최고 온도를 갱신하며 달아오르는 열기로 후끈후끈하다. 한국 여름도 이럴진대 하물며 인도는 어떠하겠는가? 여름 인도는 뜨겁게 끓어 올라 거리 위의 사람들이 마치 흐물흐물한 종이처럼 보였다. 수많은 사람의 행렬, 탈 것들로 가득한 도로, 아무 데서나 뿜어져 나오는 매캐한 연기 등이 엉켜서 그야말로 혼비백산이었다.     

숨쉬기조차 힘들 만큼 뜨거운 인도에 적응할 무렵 수도 델리를 떠나기로 했다, 말로만 듣던 기차 연착 8시간째. 처음엔 화가 났고 다음엔 배가 고팠으며 마지막엔 기차가 오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밤이 되니 모기까지 기승을 부렸다. 기진맥진한 채로 역 바닥에 주저앉아 언제 올지 모르는 기차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설마 캄캄해지기 전에 기차를 못 타는 것은 아니겠지. 결국, 자정이 넘은 시간에 기차를 탔다. 덜컹덜컹하는 기차에서 지쳐 쓰러져 잠들었다. 다른 날 같으면 옆자리 친구와 여행담을 나누며 수다를 떠느라 정신없었을 텐데. 천신만고 끝에 샛별을 보며 환승역에 도착했다. 가고자 했던 목적지까지 한 번 더 기차를 타야만 했다.          

이를 어쩌나. 환승역에서 내가 가진 돈은 ‘달러’ 밖에 없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역 직원은 오로지 '루피'로만 기차표를 살 수 있다고 했다. 원래 계획은 환승역에 도착하여 근처 은행이나 환전소에서 돈을 바꿀 계획이었다. 환전 후 표를 사는 일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건 상상조차 못 했다. 기차 연착으로 은행 문 앞에서 'CLOSED'라는 글자만 볼 수 있었다. 새벽이었으니까. 설령 문을 열었다 치더라도 ‘우리 은행은 달러를 취급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것 같이 아주 작은 곳이었다. 기차역 승무원은 표 구할 방도를 가르쳐줄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No, problem!”이라고 외치면서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덥고 습하며 말도 안 통하는 그곳의 여름이 정말 지긋지긋했다.      

“노 프라블럼은 무슨, 난 진짜 지금 프라블럼이라고! 어떡해!”

울 듯한 표정으로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누군가 다가왔다. 귀찮은 생각이 들었다. 또, 나에게 동그란 눈을 뜨며 “Which country?”라고 물을 호기심 많은 인도인일 것이라 짐작했다. 부디 그냥 가줬으면 했다.      

“음, I am Japanese. We are the World Cup friends. I want to help you.”     

나만큼이나 어색하고 국어책 읽는듯한 영어를 쓰는 일본인이었다. 인도 전통 의상을 곱게 입은 일본 여인. 사정을 듣더니 내 손에 당분간 쓸 수 있는 루피도 꼭 쥐여주었고 알록달록 색실도 걸어주었다. 여행에 행운이 있길 바란다고 했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우린 친구니까 도와주고 싶었다던 그녀. 고맙다는 인사를 할 새도 없이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인도인 남편을 뒤따라 가버렸다.           

짜증 내며 얼굴을 찌푸리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8시간 늦게 온 기차를 탓하고, 연착하고도 사과의 말 대신 ‘노, 프라블럼!’이라며 웃었던 인도 역무원에게 화내고, 카드도 달러도 되지 않는다며 역장에게 따지는 것은 어려운 상황을 변화시키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내 마음만 지옥일 뿐. 다른 사람을 탓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던 나에게 다정한 손길을 내밀었던 그녀는 천사였다. 상황을 바꾸기 위해선 차분하게 여유를 가져야 한다고 알려주고 떠났다. 인간의 희로애락은 동전 양면 같은 것이라는 깨달음이 머리를 스쳤다. 마치 망치로 ‘댕’하고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인생을 달콤하고 행복한 날로 기억할지, 쓰고 고통스러운 순간으로 기억할지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나의 마음 상태에 달린 것. 순간순간의 기쁜 감정들이 모여 파노라마 같은 행복을 만드는 것. 곱디고운 일본 여인이 천사 모습으로 나타나 내게 가르쳐준 삶의 교훈이었다.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마음을 달리하면 그 순간은 빛이 될 수 있다. 매캐한 연기, 꼬불꼬불한 미로길, 설탕 듬뿍 넣어 참 많이 달았던 차이(기차역 판매원은 ‘짜짜짜짜이’라고 부른다)가 따뜻한 추억으로 떠오른다. 힘겹게 기차를 탄 후 숨 돌리던 순간, 나에게 날아들었던 반딧불이 한 마리를 다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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