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라이트, 2017
너무 많은 이들이 훌륭한 해석과 리뷰를 남긴 영화에 대해서는 선뜻 입을 떼기 어렵다. 자칫하면 유사한 감상의 반복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내가 엄청나게 좋아하니까 꼭 이야기하고 싶은 영화들도 있다. '문라이트'가 바로 그런 영화들 중 하나다.
문라이트는 한 아이가 어른이 되기까지를 그 아이의 이름 리틀, 샤이론, 블랙이라는 세 개의 토막으로 보여준다. 포스터도 얼핏 보면 한 사람의 얼굴에 여러 빛이 비추는 듯 한데, 자세히 들여다 보면 리틀이라고 불리던 어린 아이, 샤이론이라고 불리던 소년 시절, 어른이 된 블랙 세 사람의 조각이 하나의 얼굴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샤이론의 성장에 있어 푸르게, 또는 붉게 강한 의미로 남은 두 사람이 있다. 바로 어린 시절 약물 중독에 빠진 엄마보다도 자신을 더 이해해 준 아저씨 '후안'과 외톨이었던 어린 시절부터 줄곧 옆에 있었던 친구이자 첫사랑 '케빈'이다.
후안은 샤이론에게 '다른 사람이 네가 무엇이 될 지를 결정해서는 안돼' 라고 가르쳐 주는 멘토이자, 물에 뜨는 법을 알려주며 '놓지 않을 테니 믿고 기대라' 라고 말해주는 쉴 곳이다. 불안한 어린 아이에게 의지할 수 있는 안정감을 준 그를 상징하는 것은 물이다. 한 편, 우울하고 조용한 아이 샤이론을 소소한 농담으로 웃게 해주고, 처음으로 떨림을 깨닫게 해준 친구 케빈은 불이다. 전혀 다른 속성의 두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동안 샤이론은 성장한다. 리틀은 후안의 죽음을 겪고 샤이론이 되고, 샤이론은 케빈과 떨어져 지내는 긴 시간동안 블랙이라는 이름의 어른으로 자라난다.
우리는 어릴 적 중요한 의미였던 친구나 선생님과 결국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운 좋게 태어난 곳에서 평생 사는 경우 오랜 친구를 종종 보고 살 수는 있지만, 'Grow apart (다른 방향으로 자라나다)' 라는 표현처럼 우리는 모두 다르게 성장하고, 그 과정에서 서로는 원래의 의미를 대개 지키지 못한다. 소중했던 사람이 적이 되기도 하고, 그러다 남이 되기도 한다. 가까웠던 이가 예전과 사뭇 달라진 가치관으로 말할 때, 더이상 서로 관심사가 달라 말이 통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들과 통한다고 느꼈던 시간들을 그리워한다.
또는 우리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시절을 그리워한다. 걱정 없이 뛰놀던 시절 (아마 지금 잊어서 그렇지 그때라고 걱정이 없진 않았겠지만), 경제적으로 풍족했던 시절, 좋아하는 사람들과 보냈던 시간 등 좋은 순간들은 지나가는 그 즉시 그리움이 된다.
문라이트는 한 사람이 성장하는 데 있어 가장 주요한 정서를 그리움으로 표현한다. 생각해보니 정말 성장하는 과정은 그리움 투성이다. 어린 시절 이사를 다닐 때마다 옛 친구들이 얼마나 그리웠는가. 직장인이 되면서 대학생의 자유와 여유가 얼마나 그리웠는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이별해야 할 병상에 있는 할아버지나, 매일 우리 사무실에 출퇴근하는 17살 노견은 나중에 또 얼마나 큰 그리움이 될 것인가. 성장은 이 순간을 여기에 둔 채, 나만 앞으로 나아가야하는 동작의 끝없는 반복인 셈이다.
물론 그리움은 뒤를 돌아보는 것 만이 아닌 살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리운 사람을 다시 만날 날을 위해 오늘을 사는 이들이 있듯이 말이다. 또는 과거의 어떤 순간이 그리워 그때처럼 돌아가기 위해 열심히 스스로를 다시 가다듬어야 하는 순간들도 있다.
리틀은 빈민가의 섬세한 소년에서 금목걸이를 한 우람한 체격의 마약 딜러 블랙으로 자라났다. 누군가는 바람직하지 않은 성장의 예라고 부를 지도 모르겠다. 어른이 되어 만난 첫사랑 케빈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넌 누구야?' 라고 묻는다. 하지만 그리워한 사람을 오랜 세월이 지나 만나도 다정한 미소를 띤 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순간이 있는 삶이라면, 직업이 무엇이든 겉모습이 어떻게 변했든 그게 그에게 중요할까. 바로 그런 순간의 행복을 위해 여태껏 꿋꿋이 살아왔는데 말이다.
' 만리 너머 멀리 있는 그대가 볼 수 없어도 나는 꽃밭을 일구네 ' - 루시드 폴 <오,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