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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Sep 23. 2017

반응하지 않는 사람들의 사회

나, 다니엘 블레이크, 2016

 회사에서 어떤 난처한 상황에 대해 고민할 때 상사로부터 듣는 가장 흔한 말은 '그런 것 까지 우리가 신경써주면서 일해야 해?' '너무 배려하면서 할 필요 없어' 였다. 직업 특성 상 흔히 채용 공고에서 말하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뛰어난 분'들이 모여서인지,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일에 명백히 선 긋기와 '낄끼빠빠(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는)' 능력이 쑥쑥 자라나고 있다. 점점, 나와 상관 없는 일에 반응하지 않으려 하고 무감각한 것이 차라리 편해진다.


 최근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도서 중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요소에는 반응하지 않도록 훈련하라는 메시지의 자기계발서가 있었다. 드라마 <워킹 데드> 속 좀비에 비유하여 다른 사람을 리드하거나 의견을 내세우지 않고 퇴근 시간만 바라보는 일명 '직장 좀비' 대처법에 대한 처세 책도 나왔다. 좀비라니 좀 너무한 표현인 지 몰라도, 직장에서만큼은 살아있는 사람 같지 않게 생기가 없다가 퇴근 후에야 비로소 반짝 정신이 드는 날도 종종 있었던 걸 생각하면 남 얘기 같지 않다.  


 이토록 삶에 대해 별 생각 안하고 사는 것이 유혹적인 건 왜일까?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 '이렇게 사는 건 아닌데' 라는 불편함이 밀려오기 때문은 아닐까. 또는 옳지 않은 일, 직접적으로 관계 없는 일에 반기를 들기에 우리는 대체로 너무 피로하다. 우리는 나 하나의 생존에 모두가 급급한 사회의 일원으로 반쯤 눈 감은 나날을 보내고 있다.


 

 신사의 나라라는 수식어의 이면에 극도의 빈부격차와 불합리가 숨어 있는 영국의 어두운 면을 담담하고 때론 유머러스하게 그려내는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나 하나 살기 바쁜 사람들이 차가운 세상을 어떻게 함께 살아내는가를 보여준다. 주인공 다니엘은 질병 수당을 받기에는 사지 멀쩡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구직자 수당을 받기에는 아직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의사의 처방이 있어 일을 할 수도, 수당을 받을 수도 없는 시스템의 사각지대에 몰려 있는 노인이다.


 평생 컴퓨터 근처에도 안 가본 그에게 공무원들은 온라인 양식 제출만 가능하다고 안내해 준다. 복잡한 모든 절차의 시작일 뿐인 '양식 접수' 조차도 그에게는 너무나 큰 산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예외적인 상황을 인정해 주지 않는 공무원들은 '어쩔 수 없어요' 라며 규칙을 읊어줄 뿐이다. 차가운 세상이 원하는 수당 수급자의 자격은 비록 못 갖췄지만, 따뜻한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갖춘 다니엘은 5분 늦어 수당 신청 상담을 못받게 된 싱글맘과 그 아이들을 만나게 되며 사회가 주지 않는 연대를 형성해 나간다.그리고 다니엘 블레이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보험 번호도, 화면속 점도 아닙니다. 내 이름은 다니엘 블레이크, 나는 개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나는 요구합니다. 당신이 나를 존중해주기를. 나는 한 명의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일차적으로 시스템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든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여운이 사라질 수록 내 삶에 다니엘이 가져다 준 울림은 줄어들어 간다. 시스템이 개선되지 않는 한 그로 인한 희생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망할 정부! 거지같은 시스템!'하고 화낸 뒤 조금의 불편도 감수하지 않고 안온한 일상을 이어가는 이에게 과연 더 큰 시스템을 탓할 자격이 주어질 수 있을까? 오늘의 나는 타인을 위해 과연 얼마나 고민하고, 불편함을 직면하였는가.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공부하고 싶은 싱글맘을 위해 작은 책장을 만들어 선물하는 다니엘을 통해, 말없이 다니엘을 지켜보다가 회사 컴퓨터로 온라인 양식 작성을 도와주는 공무원, 허기를 이기지 못해 구호 단체가 건넨 통조림을 열어 맨손으로 집어먹는 주인공을 다독이는 봉사자를 통해 변화의 가능성을 말한다. 우리는 종종 피로하단 이유로 시스템을 한 번에 뒤집는 기적보다 일상에서 잠시 불편함을 감수하고, 잠시 깨어서 인간답게 행동하는 것이 훨씬 쉽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흔한 표현이지만, 정말로 모든 것은 나에게서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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