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블랙홀, 1993
기상-출근-업무시간-퇴근-휴식-수면. '일상'이라고 불리는 나의 삶의 패턴은 대체로 늘 똑같다. 학창시절엔 반이 바뀌거나, 매 학기 시간표라도 바꾸는 맛이 있었는데 직장인의 시간표는 혹독함의 정도의 차이일 뿐 좀처럼 변화를 허용하지 않는다. 삶이 더이상 달라질 여지가 없다고 느낄 때 우리는 지루함, 나아가 작은 절망감을 느낀다. 어제와 똑같은 오늘이라니.
이 작은 절망감에 길들여져 갈 무렵 <Goundhog day>를 보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사랑의 블랙홀>이라는 제목으로 만날 수 있는 이 영화는 시골 축제를 취재하러 갔다가 지루하고 별 볼 일 없는 하루가 영원히 반복되는 늪에 빠져버리는 주인공 필 코너스의 이야기이다. 영화속 누구도 필의 마음을 몰라준다. 오늘이 반복되고 있다는 눈물겨운 호소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같이 취재를 온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동료 리타마저도.
필은 내일에 대한 책임감이 사라진 만큼 자유롭게 살아보기도 하고, 엉뚱한 장난을 치기도 해보지만 결국 절망과 실의에 빠진다. 심지어 죽어버릴까...? 라는 생각까지도 하며 수없이 많은 오늘들을 살아간다. 시간은 제자리걸음하지만 필의 마음에는 하루하루 쌓여가는 감정이 있다. 바로 매일 똑같은 장소에서 한결같이 그를 맞아주는 동료 리타에 대한 호감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 시니컬하기만 한 필이라는 인간 자체에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한다. 그리고 많은 영화들이 그러하듯 '사랑의 힘'으로 기적적인 일을 만들어 나간다.
나는 어른이 되면 학창 시절보다 더 짜릿하고, 다양한 경험을 많이 할 것이라 기대했다. 그렇지만 '어른'이라는 정의에 가까워져 갈수록 나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은 점점 비슷해져 갔다. 새로움과 낯선 경험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도 이건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매일이 똑같아졌다.
나는 아직도 매일 똑같은 이 일상이 가끔 낯설다. 이대로 영혼만 쏘옥 빠져나가서 일주일 쯤 떠돌다가 돌아와도 별로 달라진 점이 없을 것 같다 싶을 정도로 큰 노력없이 안정적인 삶을 살아간다. 너무 안정적인 건 어쩌면 모험으로 넘치는 삶만큼이나 위험한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 작은 위기감을 헤어스타일을 바꾸거나 하루쯤 연차를 내고 놀러가는 정도의 변화로 모면하면서, 정말 그렇게 계속 살아가는 게 어른의 삶인걸까? 이 작은 날들이 모여서 무엇을 이루는 지 알 수가 없으니 더욱 막막한 기분마저 든다.
오늘 하루 무사히 세 끼 먹었다고, 이번 달도 무사히 월급을 받아 적당히 쓰고 적당히 모았다고 잘 산 게 아닌데. 필은 리타에 대한 사랑을 느끼면서 지겨운 날들의 반복을 이겨내는데, 현실의 우리는 사랑을 한다고 아침에 번쩍 눈이 떠지고 하루 종일 콧노래를 부르지는 않는다.
그래서일까? 덴마크식 소소한 행복이라는뜻의 ‘휘게’ 나, ‘당신은 오직 한 번 산다’의 줄임말‘욜로(YOLO)’를 이어 올해는 귀소 본능, 애착이라는뜻의 스페인어 ‘케렌시아(Querencia)’까지 등장하고 있다. 유행은옷차림이나 머리 스타일을 넘어 "어떻게 행복을 느낄 것인가"라는 마음의 영역까지 침범해 왔다. 혹자는 기어코 행복에도 상술이 개입되고야말았다고 비판의 눈길을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반복되는 일상에서 행복이 뭐였더라? 싶은 이들에게 이러한 제언들은 위안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별볼 일 없는 시골 축제가 반복되는 듯한 우리 모두의 평일들이 모여 어쨌든 삶이라고 불리게 될 테고, 삶을 낭비하지 않고 싶은 마음은 모두 같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