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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Feb 15. 2018

놓아주는 것 또한 사랑일까

아무르, 2012

 노부부 조르주와 안느의 집에 도둑이 들었다. 도둑은 아무 집이나 들어올 뿐이라는 조르주와 달리 안느는 '왜 우리 집일까? 내가 자는 사이 도둑이 들면 어쩌지?' 하며 두려움에 떤다.

 또 어느날은 조르주와 안느가 식사를 하다가 안느가 갑자기 멍한 상태에 빠진다. 조르주가 찬 물수건을 얼굴에 대도, 아무리 말을 걸어도 반응이 없다. 잠시 뒤 제정신을 차린 안나는 방금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거짓말하지 말라며 조르주에게 화를 낸다. 잔잔했던 일상에 그렇게 균열이 시작됐다. 처음엔 도둑이, 그 다음엔 죽음이 그들 삶에 끼어들었다.




 경동맥 이상 진단을 받은 안느는 성공률 95%의 수술을 받지만, 나머지 5%에 들어 버린다. 그러나 안느는 조르주에게 절대 병원에 맡기지 말고, 집에서 이대로 살게 해달라고 약속해달라고 한다. 조르주는 그러겠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설마 내 삶엔 일어날 리 없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서서히 이어진다. 수술에 실패하고, 그 다음엔 혼자 의자를 옮겨 앉거나 걷지 못한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언어 능력도 서서히 사라져가 안느에겐 '아파' 와 '엄마' 라는 단어만 남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변화는 안느 뿐 아니라 조르주에게도 나타난다. 같은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하고 반복하는 안느에게 짜증을 버럭 내는가 하면, 물을 마시기 거부하며 '이러다 죽는다'는데도 물을 뱉어내는 안느를 때리기까지 한다.

 조르주는 조금씩 두려워 진다. 안느가 아프다는 사실보다도, 따뜻하고 사소한 정과 교감이 가득했던 두 사람이 이제 나눌 수 있는 건 고통과 피로의 호소 뿐이라는 사실이. 나도 모르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는 순간들은 얼마나 후회스러운가. 좋았던 순간을 떠올리며 다가올 미래를 두려워하는 것은 또 얼마나 지치는 일인가.



안느는 물을 먹기 거부하고, 자꾸만 뒤척이다 침대에서 떨어지고, 이해할 수 없는 신음소리를 낸다. 가끔 찾아오는 딸은 엄마와 대화할 수 없음에 절망한다. 정상적인 언어로 대화할 수 없는 상황에서 소통은 더욱 절실해 진다. '나는 이것을 원해'라는 언어표현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우리는 다른 어떤 언어가 필요하다. 그리고 조르주는 끝내 둘만의 언어로 안느를 이해하는 데 성공했다.(고 나는 믿는다.) 조르주는 어느 날 안느의 곁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들려 주다가 베개에 안느의 얼굴을 파묻는다. 안느가 더이상 몸부림 치지 않고, 신음하지 않고, 고요해 질때까지. 그리고 영원한 잠에 든 안느의 머리맡에 꽃들을 꺾어 수놓는다.




 이 영화는 제목을 아무르(사랑) 이라고 붙임으로 이 또한 사랑이라고 명명한다. 흔히 영화나 드라마 속 불치병 환자의 연인은 '나는 당신을 포기 안해.' 라고 외친다. 그러나 그것이 고통에 빠진 상대가 바라는 바는 아니라면? 조르주는 스스로의 목숨 뿐 아니라 모든 걸 자신에게 의존하는 안느에게 죽음을 선물하는 용기는 자신만의 몫임을 이해했다.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안느의 속내가 정말 조르주가 이해한 바와 같다면, 수십년 함께한 부부의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진 셈이다.


 십 년 전 유례없는 폭우에 우리 엄마와 언니가 산사태가 난 고속도로 한복판에 고립된 적이 있다. 기지국이 무너져 연락도 일체 안됐다고 한다. 그 때 나와 함께 집에 있던 아빠는 뉴스에서 '고속도로의 차량 모두 국도로 대피' 라는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엄마라면 모르는 국도로 빠지기보다 그자리에 차를 멈춘 채 비가 그치기를, 날이 밝기를 기다릴 것 같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시간 엄마는 정말 뉴스 보도와는 달리 한 치 앞 보이지 않는 빗속에 연료를 아끼려 시동도 끈 채 고속도로에 서있었다. 아빠는 가까운 톨게이트의 상황실로 달려가 정말 아무도 없는 지 한번만 다시 봐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무렵 신기하게도 불이 모두 꺼진 도로를 지나, 엄마차로 의경 한 명이 다가와 "다른 차들이 모두 대피해서 수습 차량들이 달려오고 있다. 여기서 시동 끄고 서계시다간 사고난다"며 상황을 알려 주었다고 한다. 우연일 가능성이 더 많겠지만, 정말 나비효과처럼 아빠가 엄마라면 이렇게 했을거야 라는 막연한 느낌으로 절박하게 움직인 덕분에 엄마가 무사히 대피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나는 초능력이나, 운명이나, 기적 같은 걸 믿는 편은 아니지만 서로를 이해하려고 매일, 수십년을 노력한 두 사람 사이에는 언어 그 이상의 교감이 생긴다고 믿는다. 아빠의 이야기를 듣고 그 믿음에 더욱 확신이 생겼다. 그렇다고 해서 조르주의 선택에 대해 쉬이 '잘했다. 안느가 바라던 바였을거다' 라고 이해해 버리는 건 성급한 판단일 지도 모른다.





 마지막 장면, 빈 집에 혼자 남았던 조르주는 안느가 살아 있는 모습을 본다. 평소처럼 부엌을 정리하고 외출을 준비한다. 조르주는 멍하니 안느를 바라보다가 아내에게 외투를 입혀 준다. 안느는 "당신은 외투 안입어?" 라고 묻는다. 그리고 둘은 문을 열고 외출한다. 도둑, 죽음이 들어오던 그 문을 열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둘의 영원한 시간 속으로 함께 걸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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