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순간이 계획에는 없던 행복

내려놓은 만큼 자유가 되는 캠핑

by 여름

신혼집은 서울에서도 가장 복닥거리는 도심 한복판이었고, 거기서 만 3년을 산 뒤 서울 근교 도시로 이사를 온 지 이제 어느덧 4년이 되었다. 이전에는 넉넉한 여유 시간을 잡아두면 회사와 집을 걸어서 오갈 수 있었는데, 이제는 어김 없이 혼잡스러운 지하철과 인파를 피할 수 없다.


쉬는 날이라고는 해도 솔직히 캠핑지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은 출퇴근길에 비해 별반 느긋하지도 않다. 짐이 많으니 준비하는 동안 마음이 어수선하고, 대부분 주말이나 연휴가 하루쯤 껴 있으니 오가는 길도 어쩐지 소란스럽다. 다른 캠퍼들은 어떨지 몰라도, 평소 긴장도 높게 살아가는 나는 사이트에 내려서 의자까지 세팅을 완료한 뒤부터 마음에 진정한 평화가 깃든다.


우리의 생애 첫 캠핑은 추석 연휴 첫째 날이었다. 그동안은 차가 없기도 했고, 명절에 시댁이나 친정을 방문해야 하는 의무도 딱히 없어 명절의 고속도로 풍경이 어떤지에 대해 감이 없었다. 2시간 반 걸리는 거리에 오후 1시 체크인이니 넉넉하게 아홉시 반쯤 출발하면 되겠지 했던 게 실수였다. 세상에, 7시간 가까이 걸려 4시가 넘어서야 캠핑장에 도착했다. 캠핑장 사장님께 늦을 것 같다고 도중에 전화도 드렸는데, 우리가 제일 마지막으로 왔는지 '일찍도 오셨네...'라며 같이 안타까워 하셨다. 나중에도 우리 자리에 한번 더 들러 어쩌다 7시간이나 걸린 거냐며 두 번이나 신기해하셔서 머쓱했다. 최선을 다해 온 거라구요 ㅠ_ㅠ


차가 막혀서 강아지가 힘든 것도 걱정이었지만, 무엇보다 속상한 건 첫 캠핑에서의 서너 시간을 고스란히 날려먹었다는 것이었다. 점심거리랑 저녁거리 메뉴를 따로 준비했는데, 도착해서 처음 타프를 쳐 보느라 서툴러서 한 시간 정도를 보내고 나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었다. 게다가 구매하고 처음 쳐 보는 타프는 180cm 메인 폴대 두 개만으로는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할 만큼 낮은 그늘을 드리웠다. 시작부터 생각 같지 않은 일 투성이었고 나는 습관대로 초조해졌다.


남편은 타프를 걷어버리자고 제안했고, 나는 왠지 고집을 부리고 싶었다. 타프가 없으면 왠지 제대로 된 캠핑이 아닌 것만 같았다(대체 왜?). 하지만 타프 치는 방법에 대해 더 뾰족한 수나 지식이 없으니 남편 말을 따랐고, 이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어차피 해는 뉘엿뉘엿했고, 허리를 펴고 자유롭게 사이트를 돌아다니는 것만으로 피로도가 훨씬 줄어들었다. 꼿꼿이 직립한 덕분에 나머지 짐 정리는 수월했고, 한결 여유로워진 몸과 마음으로 커피 한 잔을 내려마신 뒤 저녁 준비에 돌입했다.


저녁을 준비하며 두 끼를 생각하고 챙겨온 식재료를 많이 남기게 생겨 잠깐 마음이 곤란했지만, 이제는 정말 내려놓고 즐기자고 다짐했다. 캠핑은 어디까지나 쉬러 온 거니까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큰일 날 건 없었다. 놀랍게도 차분히 앉아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쿵쿵 울리던 머리가 빠르게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회사, 또는 집에서라면 이 정도 일정이 밀리고 계획이 틀어지면 아무리 마음을 가라앉히려 해도 안절부절하곤 했는데. 야외에 간이테이블과 의자만 두고 느긋하게 밥을 짓는 광경이라니. 술이 한 잔 들어가고, 배가 불러오면서는 완전히 행복을 되찾았다.


해가 넘어가고 가져온 세 개의 조명을 몽땅 켰는데 생각보다 어두웠다. 날도 조금 쌀쌀해졌으니 고대하던 장작불을 피울 차례였다. 장작불에 가까이 다가앉아 아무 말 없이 불만 바라보면서 확실히 깨달았다. 나는 정말 캠핑을 좋아하게 될 것이라는 걸.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이어가보고 싶은 취미가 생겼구나 하고 기뻤다.


첫 캠핑은 나에게 단순히 여행을 넘어서 연습의 시간이었다. 일이 생각과 다르게 굴러가도 마음을 차분히 먹는 연습. 캠핑은 뭔가를 깜빡했든, 날씨가 마음 같지 않든 아무튼 계획과 달리 흘러갈 가능성이 무척 높은 취미다. 동시에 캠핑은 내 통제력을 벗어난 많은 것들을 그러려니 하고 웃어넘기는 연습을 할 수 있는 가장 쉽고도 즐거운 훈련장이었다.


첫 캠핑을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뿌듯함을 넘어 거의 자부심을 느꼈다. 1박 2일로 놀러 가서 잘 놀고 돌아왔다는 당연한 결말에서 뭘 또 자부심까지. 그런데 정말 스스로가 몹시 자랑스러웠다. 벌레가 무서워서 이사가는 집마다 방충망 단속에 혈안이 되곤 했던, 기차/비행기가 연착됐다며 창피하게 대놓고 공공장소에서 눈물을 흘리던, 잠자리에 예민해 유럽 등 먼 땅으로 출장을 갈 때면 숙소 침대와 주변 환경을 강박적으로 확인하고 귀마개와 안대에 의존했던 나약하고 예민한 나로부터 한 단계 성장한 기분이었다. 음식으로 달려드는 벌들을 차분히 손으로 휘저어 몰아내며 하루의 첫 끼를 오후 5시에 준비할 수 있는 여유가 갑자기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 싫은 걸 압도하는 좋은 경험이란 정말 드문 일인데 단 하룻밤의 캠핑에서 내가 생각지 못한 내 모습을 발견했다는 게 너무 기뻤다. 그래! 나도 얼마든지 차분하고 느긋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물론 앞으로 예정된 수많은 캠핑지에서 나는 또 생각지 못한 상황에 동동거릴 것이다. 스케줄이 꼬이거나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아무튼 허둥대고 미간을 찌푸릴 것이다. 하지만 캠핑에서라면 분주한 마음은 금방 내려놓고, 평소의 나와는 조금 다른 내가 또 나와 주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 있다. 더구나 뜻대로 되지 않아도 날 웃겨주는 남편과 함께라면 넉넉하고 여유로운 자아가 조금은 더 자주 고개를 내밀어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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