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캠핑에 가서 태워버려야지

불멍, 방화가 엄격히 금지된 현대 사회에서 합법적인 불장난의 기회

by 여름

언제나 사람 둘에 강아지 하나로 단출한 인원의 캠핑이지만, 뭐니 뭐니 해도 캠핑의 하이라이트는 캠프파이어다. 실제로 캠핑 때마다 매번 불을 피우냐 물으신다면... 우리처럼 추위와 더위에 약한 캠퍼들은 그때그때 여건과 일정에 따라 결정하지만 불을 피우고 싶은 마음만은 한결같다 정도로 말씀드릴 수 있다. 우리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불을 피우고 싶어 한다. 불을 피우는 행위에는 단순히 예쁜 불꽃을 바라보는 것 이상의 기쁨이 있다.


서울을 떠나 수도권으로 이사 오면서, 짐을 보관할 곳이 조금 늘어나게 되었다. 서울 신혼집에 살 때 부모님이 맡아주셨던 짐들을 이제야 조금씩 내 보금자리로 도로 데려오기 시작했다. 잡다한 옷이나 책처럼 큰 감흥 없는 물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중 단연코 가장 의미 있는 짐은 테이프로 꽁꽁 봉인된 박스 두 개인데... 여기에는 열일곱 살부터 결혼하던 해까지 꾸준히 써온 일기장과 편지들이 봉인돼 있다. 엄마는 어려서부터 동생들이 가족들 앞에서 엄마의 일기장을 낭독하는 게 지긋지긋했기에 절대 열어보지 않고 지켜줄 테니 나중에 가져가라며 나의 일기장 박스를 손수 밀봉해 주셨고,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 이 박스들은 우리 집 안방 베란다 한편에 동일한 상태로 고스란히 잠들어 있다.


자못 소중한 기억들이 담겨 있지만 이 친구들은 사실, 내 마음속에 언제나 '죽기 전에 꼭 태워야 할 1001가지 땔감'으로 분류돼 있다.


고등학교 때 단짝 친구들과 수업시간마다 포스트잇에 쪽지를 써 주고받았다. 당시 좋아했던 아이돌에 대한 감상을 나누고, 먹고 싶은 메뉴를 아무 거나 나열하기도 하고, 나중에 결혼을 하면 어쩌니 저쩌니 연애가 하고 싶네 시험을 망쳤네 쟤는 왜 저럴까 나는 왜 이럴까 등등 일기장에 쓰기도 뭐 한 수준의 휘발성(?) 토크가 대다수였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이들을 쪽지라는 표현 대신 땔감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분명히 시간이 (아주 조금만) 지나면 이불을 걷어차고 싶을 이야기들이므로 태워버려야 한다는 취지에서였다. 타오르는 불꽃을 열정에 연관 짓는 사람도 있을 테고 바비큐 장작구이 등 음식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게는 소멸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도 이때부터 쌓아온 땔감들 때문인가 싶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물건을 태울 기회가 없다 보니, 그때부터 지금까지 어언 반평생 동안 땔감을 모아 온 셈이다. 그리고 캠핑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뭔가를 정말 태울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불 가지고 장난하면 혼나는 거 아니었나... 의 시대를 건너 정정당당하게 주어진 야외 공간에서 신나게 불을 피울 수 있다니! 종이나 나무를 태우면 하얗게 재가 되는 게 정말이었다니!


아직까진 실제로 일기장이나 편지를 들고 가서 태워본 적은 없다. 하지만 언젠가 나이가 많이 들면 참나무 장작들 틈틈이 나의 일기장들을 한 장 한 장 보태가며 태우고 싶은 마음은 늘 간직하며 살고 있다. 그러면서 언제나 나와 함께 불을 피우고 지켜봐 주는 남편이 그때도 나와 함께 있다면, 나의 십 대 시절의 조각 기억을 아주 조금 나눠도 좋겠다. 나 사실은, 그 아이돌을 그냥 좋아하기만 한 게 아니라 전교를 대표하는 수준이었어. 실은 철없던 시절엔 이렇게나 남의 험담을 쉽게 했어. 나는 공부나 입시에 지쳤을 때 이런 생각을 하고 살았었네. 회사 다니며 하던 소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치?


밥벌이에 찌들어 살다가 캠핑장에 가서 불 냄새를 맡으며 간간이 끊기듯 이어지는 대화를 주고받다 보면 줄어드는 장작만큼 마음은 조금씩 가벼워지는 걸 느낄 때가 있다. 그리고 그때마다 언젠가는 내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집에 쌓인 일기장들도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반드시 태워버리라 상상한다. 사람의 마음은 정지된 형태의 무언가가 아니기에 계속 다듬어나가야 한다는 것도, 순간의 기분을 누군가에게 드러냈다가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생각보다 깊은 상처를 남길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 지금은 땔감의 생산량이 확연히 줄었기에 사실 아무 생각 없던 시절 해맑게 쌓아 올린 날것의 기록들은 나름대로 귀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엄청난 범죄의 자백이 담기거나 알려지면 대단히 망신살이 뻗칠 것도 없는 시시한 이야기들이더라도, 온전히 내 것이므로 언제든지 누구도 모르게 홀가분하게 태워버릴 기록들이 산더미라는 생각을 하면 은근한 기대감이 든다.


쪽지를 쓰는 여유는 고사하고 순간의 감정을 전할 옆반 친구도 없는 사회생활은 때로 팍팍하다 싶을 만큼 어른스러워졌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홀가분하게 태울 수 있는 나만 아는 땔감을 넉넉히 베란다에 보관한 채로, 매 캠핑마다 조금씩 불 피우기 스킬은 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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