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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7일 차 : 혼자 걸을까, 같이 걸을까?

27.7km, 8시간 걷기

by 베라노드림

여전히 자다 깨다 반복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은 처음으로 장거리를, 28km 정도를 가야 해서 동행들과 평소보다 일찍 출발했는데 아직 해가 뜨기 전이어서 불빛 하나 없는 컴컴한 길을 핸드폰 불빛과 동행들에게 의지해서 걸어가야 했다. 동행들과 같이 출발했지만 걷다 보니 각자의 속도에 따라 따로 걷게 되면서 어느 순간 혼자 걷게 됐는데 어두운 길을 혼자 걷고 있으니 갑자기 무서웠지만 앞뒤로 동행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안정되면서 든든해졌다.

그러다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봤는데 별이 너무 잘 보였다. 한국에서는 이 시간에 걸을 일도 없고 별을 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는데 낯선 땅에서, 낯선 시간에 이렇게 별을 보며 걷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라 내가 이 시간에, 여기를 걷고 있다는 게 새삼 놀라우면서도 지금 이 시간에, 여기 있을 수 있어서 참 행복하다고 느꼈다.


걷다 보니 아침을 먹을 수 있는 카페가 보여 쉬었다 가기로 했다. 야외에 앉아 간단히 아침을 먹고 있는데 점점 해가 뜨기 시작하더니 핑크빛 하늘로 변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이뻐서 먹는 걸 잠시 멈추고 하늘을 바라봤다. 3일 차에 봤던 하늘과는 다른 색감과 분위기여서 또 다른 느낌이었다. 아침을 먹고 출발했는데 여전히 하늘이 이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다들 멈춰서 한참을 바라봤다. 다들 같은 곳을 바라봤고 동행들 모두 행복해 보였다.


해가 뜨다 보니 햇빛이 너무 강렬해서 걷기 힘들었지만 오늘의 목적지를 향해 열심히 걸었다. 힘들 때는 잠시 쉬다가 힘내서 다시 걷고 또 힘들어지면 쉬다가 이렇게 반복하다 보니 오늘의 도착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늘의 도착지는 어제와 비슷한 규모의 도시였는데 숙소까지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가는 길에 커다란 나무가 가지런히 정렬되어 반듯하게 일렬로 서 있는 그 모습이, 다리를 건너갈 때는 강이 흐르고 있는 그 주변이 너무 이뻐서 보는 즐거움 때문에 그나마 덜 힘들게, 기분 좋게 갈 수 있었다.


오늘은 처음으로 기부제 알베르게에 가기로 했다.

수녀님들이 운영하시는 곳으로 침대는 배정해주지 않고 자유롭게 고를 수 있었는데 2층만 남아서 어쩔 수 없이 2층을 써야 했다. 그런데 2층 침대에 양 옆으로 난간이 없어서 너무 당황스러웠고 자면서 떨어지지 않을까 불안했는데 다행히 괜찮았다. 짐정리하고 씻고 동행들과 같이 빨래하러 근처 빨래방에 갔다가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패스트푸드점에 가서 간단히 간식 먹고 마트 가서 필요한 거 사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서 잠시 쉬다가 이곳에서 유명하다던 타파스를 먹기 위해 8시쯤 나갔다. 낮에 빨래하러 나갔을 때만 해도 거리에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밤에 나가니 사람이 많았고 특히 타파스 거리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가장 유명하다던 양송이 타파스를 맛있게 먹고 또 다른 가게에 가서 다른 종류의 타파스를 먹으며 분위기를 즐겼다.

그러나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리고 통금시간이 있어서 오래 앉아 있을 수는 없어서 얼른 먹고 나왔다.

돌아오는 길에도 사람들이 바글바글 했다. 원래 시끄럽고 사람 많은 걸 좋아하지 않는데 여기는 그 분위기가 잘 어울렸고 싫지 않았다. 오히려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느껴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렇게 10시 안 돼서 숙소로 들어왔고 10시가 되니 바로 소등해 줘서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은 어깨가 아프다거나 발바닥이 너무 아프다는 생각보다는, 예기치 못하게 새벽에는 별을 보고 해가 뜰 때는 이쁜 핑크빛 하늘을 봤으며 맛있는 걸 먹고 분위기를 즐기다 보니 행복하다고 느끼는 마음이 훨씬 컸다.

그만큼 내가 이 길에 적응하고, 내 몸이 적응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안심되었다.

그와 동시에 한편으로는 마음이 약간 복잡하기도 했는데 바로 두 번째 선택의 기로에 놓였었기 때문이다.

낮에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내일은 얼마큼 걷고 어디까지 갈 건지 얘기를 나눴다.

사실 나의 원래 일정은 이곳에서 하루 더 쉬거나 내일 가는 길에 머무르고 싶은 알베르게가 있어서 짧은 거리를 가는 거였다. 동행 중 한 명은 30km를 걸을 거라고 했고 또 다른 한 명은 20km 정도 걸을 거라고 해서 각자 가고자 하는 도착지가 달랐다. '아마 이제는 진짜 서로 떨어져 걷겠구나 이제 헤어지겠구나' 생각이 들었는데 결론은 다 같이 내일 20km만 걷기로 했다.

분명 혼자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려고 떠나온 길인데, 이들과 함께 한지는 불과 일주일 정도밖에 안 됐는데도 동행들이 좋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쯤에서 정리하고 원래 계획대로 혼자 가는 게 맞을지, 아니면 동행들과 함께 가는 게 맞을지 고민하다가 결국 오늘도 나는 동행들과 함께 하는 쪽을 택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오롯이 혼자 걷는다는 게 상상이 되질 않았고 또한 동행들과 함께 한다고 해서 계속 같이 걷는 게 아니라 같이 출발은 하지만 각자의 속도와 컨디션에 따라 혼자 걷기도 하고 혼자 걷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혼자 걸을 수 있으니 내가 여기 온 이유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선택이 과연 앞으로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모르겠지만 이 길이 끝날 때까지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다거나 혹은 어떠한 기적이나 깨달음이 없다고 느낄지라도, 너무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소중한 인연이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만큼 빠른 시간에 그들에게 마음을 열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사람인데 이 길은 또, 나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일은 비가 온다고 하는데 만약 비가 온다면 순례길 걸으면서 처음 비를 맞으며 걷는 거라서 걱정이 되지만 과연 어떨지, 내일도 오늘처럼 행복한 마음으로 잘 걸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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