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km, 5시간 정도 걷기
어제는 침대에 난간이 없어서 떨어질까 봐 불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이전까지는 한번 깨면 쉽게 다시 잠들 수 없었고 뒤척이다가 겨우 잠들거나 아니면 잠들지 못해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었는데 어제는 중간에 몇 번씩 깨긴 했지만 바로 잠들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 길을 걸은 이후로 처음으로 제대로 잠을 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자다 깨다 반복하다가 누군가의 알람 소리에 일어났다.
씻고 준비 후 어제 묵었던 기부제 알베르게에서 조식도 주셔서 든든하게 먹고 출발하려는데 수녀님께서 “부엔 까미노”라고 말해주시면서 안아주셨다. 어제 처음 뵌 분이지만,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하겠지만 그 진심이 전해져서 너무 따듯하게 느껴졌고 힘이 되었다.
그렇게 좋은 에너지를 받고 출발했는데 동행들이 말이 없었다.
기분이 안 좋았거나 싸운 건 아니었는데 다들 컨디션이 안 좋았는지 아니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는지 1시간 넘게 서로 말없이 걷다가 중간에 잠시 쉬면서 그때서야 얘기를 나눴다.
같이 출발했지만 어쩌다 보니 혼자 걷게 되었고 그때 한국에서 연락 한통을 받았다. 지금 혼자 걷고 있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신경 쓰였고 걷는 내내 그 생각만 났다.
걷다 보니 카페가 나와서 아침을 먹고 쉬다가 다 같이 출발했는데 이유를 모르겠지만 오늘은 어깨나 발바닥이 아프다기보다는 그냥 전반적으로 힘들어서 뒤쳐지며 혼자 걷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내 옆에 외국인 동행이 같이 걷고 있었다.
영어를 잘 못하는데 대화를 하려다 보니 힘들었는데 서툴지만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걸어갔고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늘은 많이 걷지 않았는데도, 오르막이 많다거나 길이 힘들지 않았는데도, 온다던 비도 안 오고 햇빛도 없어서 걷기 좋은 조건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니면 한국에서 받은 연락 한 통 때문이었는지,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지만 그냥 힘들었다.
이렇게 이유도 모르게 유난히 힘들어하던 나를, 외국인 동행이 옆에서 챙겨주고 있었다는 걸 일기를 쓰면서 알게 되었다. 오늘 있었던 일을 쓰다 보니 그 동행이 발맞춰 같이 걸어주고 내가 힘들어 보이면 잠시 쉬었다 가자고 해주거나 내가 쉬었다 가자고 하면 흔쾌히 같이 쉬어주고 내가 힘들어하지 않게 대화를 이어 나가며 옆에 있어준 걸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사실 같이 걸을 때만 해도 차라리 혼자 걷고 싶은데, 같이 걷고 있어서 불편하다고 느껴졌었는데 돌이켜보니 내가 계속 혼자 걸었다면, 안 좋은 생각이나 더 우울한 생각들로, 그 기분으로 나의 하루는 엉망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동행에게 그런 마음을 가졌던 내가 너무 부끄럽고 미안했고 또 너무 고마웠다.
먼저 도착해서 카페에서 쉬고 있던 동행들을 만나 같이 알베르게로 갔는데 숙소가 너무 이뻤고 우리 동행들을 같은 방으로 배정해 주셔서 우리끼리만 있을 수 있어서 더 좋았다.
숙소 체크인 후에는 각자 개인시간을 가졌다. 나는 씻고 빨래하고 일기를 쓰다가 몇몇 동행들이 쉬고 있다던 카페로 가서 핫초코 마시며 같이 얘기 나누다가 다시 숙소에 들어가서 잠깐 쉬다가 또 나가서 동네 구경을 했는데 도착해서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힘들었던 마음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편안해졌다.
이렇게 각자 또는 같이 시간을 보내다 보니 저녁시간이 돼서 저녁 먹으러 나갔다.
이곳은 작은 마을이라 순례객들이 대부분 지나쳐 가는 곳이다 보니 식당이 2개밖에 없었고 피자랑 빠에야 중 선택해야 했는데 우리는 빠에야를 택했다. 그전에 먹었던 빠에야보다 훨씬 맛있었고 직원들도 친절해서 너무 만족스러웠다.
오늘은 짧게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난히 힘들게 느껴졌던 하루였다.
한국에서의 받은 연락으로 정신적으로 힘들어서였는지, 적응 됐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는지, 컨디션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건지 모르겠지만 혼자였다면 계속 부정적인 생각만 하며 그 생각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었을 텐데 같이 맛있는 거 먹고 얘기 나누는 것만으로도,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돼주는 동행들이 있어서 오늘 하루도 기분 좋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매일 밤 잠들기 전에, 무사히 도착했음에 감사함을 느끼고 이 길 위에 있을 수 있다는 것에 행복함을 느끼는데 오늘은 미안한 마음과 동시에 감사한 마음이 더 크게 느껴졌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