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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9일 차 : 소소했지만 결코 소소하지 않은 기억

25.2km, 6시간 30분 걷기

by 베라노드림

오늘은 동행 중 몇 명이 더 멀리 가길 원했고 나 포함 나머지 동행들은 거기까지는 못 갈 것 같아서 오늘만 따로 걷기로 했다.


오늘은 카페에 먼저 들러 아침으로 토스트와 오렌지주스를 든든하게 먹고 출발했다.

2시간 좀 넘게 걷다 보니 대도시는 아니었지만 마을보다는 조금 큰 도시가 나왔다. 분명 평범한 느낌의 도시였는데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고 조용했으며 건물들이 많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구간에서는 사막 같은 느낌도 있었다. 같은 도시인데도 다른 분위기가 느껴지는, 이곳이 참 신기했는데 그 도시를 벗어나 또 다른 마을을 향해 가던 길은, 안 가봤지만 미국 어딘가에 있을 법한 풍경이었고 신기해서 동행과 한참을 그 풍경에 대해 얘기하며 걸었다. 아마도 흐린 날씨 때문에 이런 느낌을 더 느낄 수 있게 된 것 같은데 여태껏 보지 못했던, 풍경을 보며 걷다 보니 다음 마을에 도착했다. 여기서 쉴지 말지 고민했는데 그다음 마을까지는 한참을 가야 해서 이른 시간이지만 여기서 점심을 먹고 쉬다가 다시 출발했다.


분명 오늘 날씨가 흐렸었는데 걷는 도중 해가 보이기 시작했고 모자를 써야 할 정도로 햇빛이 너무 강해졌다.

좀 전까지만 해도 오늘은 햇빛이 없어서 걷는 게 좀 수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늘 하나 없는 땡볕을 걸으려니 너무 힘들었다.

쉬고 싶어도 쉴만한 그늘이 보이지 않아서 계속 걸어가던 중 저 멀리 오로지 한 그루만 우뚝하게 서 있는, 큰 나무가 보였고 너무 반가웠다. 다들 힘들어었는지 동행 중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저 나무 밑에서 쉬어가자는 말을 했고 모두 그 나무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땡볕에 걷기 너무 힘들었는데 큰 나무가 만들어 준 그늘 밑에 앉아 쉬고 있으니 바람도 솔솔 불어왔다.

파란 하늘, 나무 하나 없던 허허벌판, 우리 동행들 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던 한적했던 길, 햇빛을 피해 그늘 밑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살랑살랑 불어오던 바람이 만들어준 적당한 시원함, 이 모든 것들이 다 좋았다. 여기서 동행들과 앉아 쉬면서 얘길 나누는데 잠깐이지만 이 순간이 참 행복했고 나뿐만 아니라 다른 동행들도 행복해 보였다.


그렇게 20분 정도 쉬다가 오늘의 마을을 향해 출발했다.

오늘도 우리는 정석 루트가 아닌, 우리만의 루트로 대부분 순례자들이 지나쳐가는 마을로 가기로 했다.

찾아보니 유령의 도시라고 한다던데 왜 그렇게 말하는지 느껴질 정도로, 리조트처럼 보이는 많은 건물들과 골프를 칠 수 있는 곳이 보이긴 했는데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 마을에 과연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싶을 정도로 너무 휑하고 삭막하게 느껴졌다.


오늘의 알베르게는 순례길 루트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있어서 좀 더 걸어가야 되다 보니 힘들게, 겨우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힘들게 왔지만 알베르게는 가정집처럼 편하게 보였고 아늑해서 너무 마음에 들었고 좋았다.


씻고 빨래 맡기고 카페로 갔는데 길에는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다 이 카페에 모여있었던 건지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배도 살짝 고파서 간단히 먹으려 했는데 곧 브레이크타임이라고 해서 음식을 먹지는 못하고 핫초코 한잔만 겨우 마실 수 있었다.

브레이크 타임에는 가게가 잠시 문을 닫아서 야외 테이블에 앉아 시간을 보내다가 너무 추워서 다시 숙소로 갔고 숙소에서 각자 개인시간을 가진 후 저녁 먹으러 다시 나왔다.

문 연 식당이 아까 핫초코 먹던 곳 밖에 없어서 다시 그 식당으로 가야 했다.

립이랑 빠에야, 소고기 요리를 시켰는데 소고기는 너무 질겨서 별로였고 빠에야는 나쁘지는 않았지만 쌀이 덜 익은 느낌이었는데 립이 너무 맛있었다.

생각하지도 않았던 메뉴였는데 너무 맛있어서 다들 행복해하며 맛있게 먹었다.


어제는 그렇게 힘들더니, 오늘은 또 적응이 된 건지 괜찮았다.

그저 걸어야 하니까 걸었는데 걸으면서 다른 생각들 보다는 '오늘은 날씨가 너무 흐리다, 여기 풍경은 너무 신기하고 이쁘다, 이 마을은 이런 모습이네, 도착해서는 뭘 먹을까' 등등 걷는 그 순간이나 그때 보이는 것들 혹은 순례길 일상에 집중하며 걸었다.

힘들게 느껴지거나 아픈 곳이 없어서 그런지, 적응이 돼서 그런 건지 그때그때 순간과 온전히 이 길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이제야 진짜 내가 순례길을 제대로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순례길을 걸으며 기억에 남는 순간 중 하나인, 그늘 밑에 앉아 잠시 쉬어갔던 기억인데 이게 뭐라고 그때 그 분위기가 너무 좋았어서 지금까지도 순례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으로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또한 저녁으로 먹었던 립도 너무 맛있게 먹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어떻게 보면 걷다가 힘들어서 그냥 그늘 밑에 앉아 쉬어갔을 뿐이고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뿐 별거 아닌, 소소한 것들일 수 있지만 나에게는 의미 있었던, 소소했지만 확실한 행복이어서 이날은 나에게 특별한 하루, 기억하고 싶은 하루가 됐고 행복했던 기억으로 계속 남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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