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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0일 차 : 예상치 못한 일들, 나쁨과 좋음

28.1km, 9시간 걷기

by 베라노드림

오늘은 좀 먼 거리를 가야 해서 평소보다 일찍 출발했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캄캄한 길을, 불빛과 동행들에 의지하며 걸어가고 있는데 1시간쯤 넘게 걸었을까, 갑자기 명치 쪽이 너무 아파 왔다.

여태 껏, 명치가 아픈 적은 없었는데 예상치 못한 새로운 통증에, 너무 아파서 당황스러웠지만 명치 쪽에 있는 가방 끈을 풀고 나니 좀 괜찮아졌다. 그런데 문제는 이 끈을 풀고 나니 등이 너무 아파 왔다. 그렇게 통증은 계속되었고 1시간 30분 정도 걸으니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 마을에서 어제 따로 걸었던 동행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동행들을 만나 카페로 가서 아침을 챙겨 먹고 여기서부터는 같이 걸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계속 명치가 너무 아팠다. 가슴 쪽에 가방끈을 다시 착용하면 명치가 아프고, 가슴 끈을 풀면 등이 아파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너무 힘들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평소에는 잘 흘리지 않는 땀도 많이 났다. 몸이 안 좋다 보니 뒤쳐지기 시작했고 동행들 중 마지막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오늘 왜 이렇게 명치가 아픈 건지, 그동안 걸었던 피로누적으로 몸에 이상이 생긴 건지 걱정스러웠다. 좀 쉬다가 걸으면 괜찮아지나 싶다가도 이내 다시 명치 또는 등이 아팠는데 명치는 숨만 크게 쉬어도 아파서 차라리 등이 아픈 게 나을 것 같아서 가슴끈을 착용했고 그렇게 등이 아픈 채로 계속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걷다가 잠시 쉬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와서 처음으로 우의를 꺼내 입었다.

우의를 입고 걷는 도중 어쩌다가 지나가던 트럭을 향해 손을 흔들었는데 기사님이 같이 손을 흔들어주셨다. 이게 뭐라고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 이후로 지나가는 트럭마다 손을 흔들었고 고맙게도 모든 기사님들이 웃으면서 같이 손을 흔들어주셨다.

손을 흔들었던 그 순간은 잠깐이었지만 그 이후로 걷는 동안 즐거웠고 큰 힘이 돼서 너무 감사했다.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해서 알베르게 체크인을 하고 씻고 나서 빨래 맡기고 근처 카페&바에서 간단히 간식을 먹는 도중 이제는 못 볼 줄 알았던, 잘 챙겨주시던 부부님도 이 마을이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고 기쁜 마음으로 만나러 갔다.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했었기에 다시 볼 수 있어서 너무 반가웠는데 또 우리 동행들을 챙겨주시며 과일을 사주셨다. 항상 받기만 한 것 같아서 너무 죄송했고 또 감사했다.


마트로 가는 길에 동네 구경을 했는데 작은 줄 알았던 마을이 생각보다 컸고 마을에는 곳곳에 이쁜 벽화들이 많아서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마트 가서 필요한 거 사고 숙소로 다시 돌아와서 잠시 쉬다가 저녁을 먹으러 갔다.

오늘 제일 기대했던 일정 중 하나인 저녁 식사.

이 알베르게에서 같이 운영하는 식당이 있는데 립이 너무 맛있다는 후기를 듣고 숙소도 여기로 정했었다.

어제저녁에 먹은 립도 너무 맛있었기에 기대가 컸고 체크인할 때 저녁식사까지 예약해 두었다.

정해진 예약시간에 맞춰 식당으로 가니 한국인들이 엄청 많았는데 누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쳐다봤는데

한국인 부부였다. 한국에서 떠나올 때, 비행기 옆자리에 앉았었는데 그분들도 순례길을 가신다고 해서 너무 반가워서 비행기에서 많은 얘기를 나눴었다. 잠깐 만난 사이였는데도 딸 같이 챙겨주셔서, 그분들 덕분에 무사히 파리 시내까지 갈 수 있었고 같이 걷지는 않았지만 순례길로 가는 첫 관문의 시작을 함께 해서 나한테는 의미 있고 너무 감사했던 분들이었다. 그러나 그분들과는 일정이 달라서 다시는 못 뵐 줄 알았는데 여기서 이렇게 볼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기에 더 반가웠다. 나중에 동행들이 말하길, 내가 그렇게 활짝 웃는 모습을 처음 봤다고 했다. 내 표정이 말해주듯이,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반가움이었다.

그분들도 립이 너무 맛있다고 해서 다른 숙소에 머물지만 저녁을 먹으러 왔다고 하셨고 그동안의 근황과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제는 진짜 뵐 수 있는 날이 없을 것 같았다.

실제로 이 길이 끝날 때까지 다시는 만나지 못했고 걷고 있던 도중 순례길 단톡방에서 그분들이 무사히 완주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너무 기쁜 소식이었다. 그분들이 무사히 산티아고에 도착하시길 바랐는데 너무 다행이었고 감사했다.


동행들과 메뉴를 보며 고민하다가 이것저것 시켰고 립을 먹었는데 너무 맛있었다. 어제는 전혀 기대 없이 먹었는데 맛있었고 오늘은 기대하고 먹어도 너무 맛있었다.


오늘 나만 힘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동행들도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생각해 보니 순례길 걸은 이후 처음으로 꽤 오래, 9시간이나 걸었으니 힘들만했던 것 같다.

걸을 때는 명치도 아프고 등도 아파서 어떻게 걸어가나 싶었는데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 도착은 했고 도착해서 씻고 간단히 배를 채우고 나니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괜찮아져서, 바닥났던 힘도 다시 생겨서 마을 구경도 하고 일기도 쓰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초반에는 생각지도 못한 명치와 등 통증으로 너무 힘들고 기분이 안 좋았는데 걷다 보니 예상치 못했던 인사와 만남들, 기대했던 저녁식사의 만족으로 행복해졌고 내일은 명치가 아프지 않길 바라며 행복한 마음만 가득한 채로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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