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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1일 차 : 계획대로 되지 않아

27.6km, 9시간 걷기

by 베라노드림

어제 걸을 때 명치가 너무 아파서 오늘은 좀 편하게 가고 싶었다. 그래서 가방을 도착지까지 보내주는 서비스를 이용하려 했는데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줄 알았고 예약을 하지 못한 나는, 어쩔 수 없이 가방을 메고 걸어아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출발하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어떤 순례자가 이 서비스를 이용하는지 출입구 쪽에 가방을 두고 나가는 것을 보고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지 물어봤더니 서비스업체를 알려주셨다. 그 업체에 연락을 하니 다행히 도착지까지 가방을 보내주기로 해서 가방을 보내고 가볍게 출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카페에서 아침을 먹다가 가방을 잘 못 보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래 오늘은 오르테가라는 마을까지만 가기로 하고 그 마을에 있는 알베르게로 가방을 보냈는데 침대가 몇 개 없어서 아마 이미 예약이 꽉 찼을 거라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그 알베르게에 예약을 하지 않아서 오늘 거기서 숙박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고 만약 거기서 머무르지 못한다면, 내 가방은 어디로 가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 알베르게에서 가방을 맡아주면 다행인데 그게 아니라면... 갑자기 너무 불안해졌다.

그래도 이미 벌어진 일이니 가방을 보낸, 그 알베르게까지는 가야 했다.


오늘은 비는 안 오는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자욱해서 마치 꿈속을 걷는 것처럼, 판타지 세계에 와 있는 느낌이다. 몽환적이면서도 신기했는데 한동안 그렇게 걷다 보니 점점 안개가 걷히고 해가 나기 시작했다.

안개가 자욱한 길을 걷는 것도 좋았는데 해가 보이기 시작하니 확실히 기분이 더 좋아졌다.




동행들과 다 같이 쉬고 출발했는데 걷다 보니 각자의 속도에 따라 흩어지게 되었고 혼자 걷게 되었다.

혼자 걷다 보니 생각이 많아졌는데 여길 떠나오기 전 일했던 곳이 생각나며 그와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떠올랐고 보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 슬퍼지고 울컥했다.

그러다 내가 10년 넘게 해 오던 일을 앞으로도 계속하는 게 맞는 걸까, 계속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등등 내 일에 대한 고민으로 생각이 많아졌다.

사실 내가 순례길을 떠나기로 결심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내 일에 대한 고민이기도 했다.

일을 할 때는 늘 스트레스받고 이 길이 내 길이 맞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고민하게 만들어서 너무 힘든데 막상 일을 하고 있지 않을 때는 얼른 다시 하고 싶고 다시 하면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늘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이 길을 걸으며 그 혼란스러움을 정리를 좀 하고 싶었는데 오늘 마침 혼자 걷게 되면서 생각을 하게 됐는데 여전히 답을 내리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게 계속 생각하며 걷다 보니 저 멀리 동행들이 보였는데 경찰들과 사진을 찍고 있었다.

경찰들이 순례길 도장도 찍어주시고 사진도 같이 찍어주시고 친절하게 대해 주시고 이것저것 물어봐주시며 관심 가져주셔서, 신기했고 감사했다. 색다른 경험이었다.

여기서 동행들 몇몇과 같이 걷다가 또 혼자가 되어 걸어가는데 저 멀리 푸드트럭이 보였다.

푸드트럭만 보이면 반가워서 걸음을 재촉하게 되는데 도착하고 나서 보니 몇 명 동행들이 쉬고 있어서 더 반가웠다. 바람은 살랑살랑 불어오고 커다란 나무가 만들어주는 그늘에 앉아 동행들과 얘기 나누고 사진도 찍으며 쉬다가 다시 출발했다.


드디어 가방을 보낸 알베르게에 도착했는데 예약을 하지 않았어도, 예약이 꽉 차서 묵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숙소 사장님이 가방을 잘 맡아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여기 숙소에서 카페도 같이 운영하고 있어서 잠깐 쉬다가 오늘 머물 곳을 찾기 위해 가방을 메고 다시 길을 나섰다.

여기 오기 전까지는 가방을 안 메고 걸어서 그나마 편했는데 가방을 메고 다시 걸으려니 힘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더 안 좋은 일은, 지금 가려는 마을에도 알베르게가 몇 개 없는데 그 마저도 자리가 몇 개 안 남았다는 소식을 듣고 조급해졌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 동행들을 잘 챙겨주시던 부부님께서 이 구간을 걷고 계셨고 그분들께서 먼저 도착하셔서 우리 동행들 자리를 예약해 주셨다고 했다.

너무 감사했다. 예약은 되어 있지만 혹시 모르니 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단지 4km만 걸으면 되는데도, 가방을 안 메고 걷다가 메고 걸으려니 너무 힘들었는데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바람까지 불어서 더 힘들었다.

휘청거리며 걷다가 겨우 다음 마을 알베르게에 도착했는데 남은 자리가 몇 개 없었고 동행 중 1명은 같이 머물 수 없게 되어 또 다음 마을로 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자진해서 1명이 다음 마을로 가겠다고 했고 나머지는 여기서 멈추기로 했다.

모두가 다 힘들었을 텐데 먼저 나서서 다음 마을까지 가겠다고 말해준 동행에게 너무 미안하고 고마웠다.


이 마을도 크지 않아서 저녁에 문 여는 식당이 몇 개 없었고 겨우 예약을 하고 저녁 식시시간까지 자유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순례자 메뉴로 애피타이저, 메인요리, 디저트 이렇게 순서대로 나왔는데 맛있지는 않았지만 배가 고팠고 이걸 먹지 않으면 다른 대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밥 먹고 나오니 날씨가 더 안 좋아졌는데 바람도 더 많이 불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늘 많이 걸어서인지, 마지막에 날씨가 안 좋아서인지 동행들이 컨디션이 좋아 보이지 않았고 다들 저녁 먹고 쉬다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은 가방을 보내주는 서비스를 이용 못할 줄 알았는데 다행히 이용할 수 있었지만 계획했던 거리보다 좀 더 걸어야 했고 날씨도 오락가락했다. 아침에는 몽환적인 분위기에서 걷다가 점심에는 햇빛이 쨍쨍한 맑은 하늘아래에서 걷다가 오후에는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바람을 뚫고 걷다가 저녁에는 비까지.

하루 만에 모든 날씨를 다 경험했고 계획했던 대로 되지 못했는데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이런 게 순례길을 걷는 묘미인 건가 싶었다.

그리고 지난번의 헤어짐으로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부부님을 어제에 이어 또다시 뵐 수 있어서 너무 좋았는데 알베르게까지 예약해 주셔서 너무 감사했고 항상 받기만 한 것 같아서 너무 죄송했다.

그리고 오늘은 걸으면서 내가 여기 온 이유 중 하나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됐는데 답을 내리기는 쉽지 않아서 앞으로 걸으면서 좀 더 생각을 해봐야 될 것 같다.

이 길이 끝날 때쯤에는 꼭 그 답을 찾길 바라며 내일은 두 번째로 대도시에 입성하는 날과 동시에 연박을 하기로 했는데 맛있는 거 먹고 충분히 쉬면서 재충전하고 힐링하는 시간을 잘 보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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