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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2일 차 : 비 온 뒤 맑음

22.6km, 6시간 40분 걷기

by 베라노드림

오늘은 대도시 입성과 동시에 연박하는 날이라 잔뜩 기대에 부풀었지만, 역대급 힘든 날이었다.

어제, 저녁 먹고 돌아오는 길에 날씨가 심상치 않더니 새벽부터 비바람이 몰아쳐서 걱정했었는데 출발하려고 나왔을 때는 다행히 비가 오는 듯 안 오는 듯 약하게 내리고 있었다.

이른 시간에 나와서 깜깜했고 날씨도 좋지 않았으며 도로 옆을 걸어야 했기에 위험해서 동행들이 일렬로 서서, 앞사람 발만 보고 걸어갔다. 그렇게 한 시간쯤 걸었을까, 다음 마을에 도착했고 어제 혼자 이 마을로 와야 했던 동행을 만났는데 하루 헤어졌었는데도 다시 만나니 너무 반가웠다.


한참 오르막을 오르는데 바람이 너무 강했고 바람에 휘청거리다가 원래 좋지 않았던 왼쪽 무릎 쪽에 충격을 받았다. 찌릿함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느낌이 심상치 않아서 그 뒤로는 조심스럽게 걸으며 내리막 길을 내려왔다.

그러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 정도로 비바람이 너무 심하게 몰아쳤고 멀리 볼 수 없어서 바닥만 보며 아까 충격받았던 무릎 때문에 일부러 천천히 걸었는데 그렇게 걷다 보니 동행들과 점점 멀어져 갔다. 혼자 비바람에 휘청거리며 천천히 걷고 있으니 순례자들이 지나가면서 괜찮냐고 물어봐주는데 대부분 처음 본 순례자들이었는데도 물어봐주고 걱정해 주는, 그 마음들이 너무 고마웠다.

괜찮지 않았지만 애써 괜찮다고 말하거나 지금 이 날씨에 대해 잠깐이지만 서로 얘기 나누고 공감하며 위로하면서, 나만의 속도로 걸어갔다.


걸으면서 '이런 날씨에도 걸어야 하는 건지, 이렇게 걷는 게 맞는 건지, 이게 뭐 하는 건가' 계속 이런 생각만 했다. 오늘 걸은 것 중에서 이때가 제일 힘들었다.

그렇게 힘들게 걷다 보니 마을에 진입했다.

비바람은 잦아들었지만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아무 생각 없이 앞만 보고 가고 있었는데 어느 카페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동행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모르고 지나칠까 봐 내가 오는지 안 오는지 계속 지켜봤을 텐데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대부분의 순례객들이 비바람을 뚫고 힘들게 걸어오다가 이 카페에서 다들 쉬어가다 보니 앉을자리가 없었지만 겨우 자리를 잡아 핫초코 마시며 몸을 녹이고 그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운 종류의 또르띠야를 먹으며 배를 채웠다. 계속 사람들이 들어와서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얼른 먹고 나왔는데 다행히 비가 그쳐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바람은 불어 걷기 힘들었다.


대도시에 들어섰는데 숙소는 보이지 않았고 비는 약하게 내리고 있고 다 와 갈 듯한데 아직은 멀었고... 너무 힘들었다. 그렇게 도시 안에서만 거의 2시간을 걸어가서야 점심시간쯤, 드디어 도착했다. 숙소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숙소 근처에 있던 일식당으로 갔는데 여기 올 생각으로, 힘들지만 버티면서 걸어왔었다. 먹고 싶은 게 너무 많았지만 고민 끝에 야끼 소바를 먹었는데 오늘 걸었던 힘듦이 다 잊히는 맛이었다. 너무 맛있었다.

힘들게 걷고 난 후 먹는 음식은 뭘 먹어도 맛있는데 오랜만에 아시안 음식을 먹어서 더 좋았다.


다 먹고 예약해 둔 숙소로 갔다. 연박하기로 해서 독채를 빌렸는데 생각보다 좋아서 만족스러웠다.

짐 풀고 씻고 나니 날씨도 좋아졌는데 이대로 숙소에 있기는 아쉬워서 혼자 도시 구경을 하러 나갔다.

순례길에 오른 이후 두 번째 대도시였는데 이제야 비로소 진짜 유럽에 온 느낌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지도도 보지 않고 무작정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고 건물들과 풍경들이 하나같이 다 이뻐서 사진도 많이 찍고 눈으로도 많이 담았다.


숙소로 돌아와 쉬다가 우리를 잘 챙겨주시던 부부님도 오늘 이 도시에서 머무른다고 하셔서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고 저녁 메뉴는 중식으로 정했다. 점심에 일식도 맛있게 먹었는데 중식도 너무 맛있었다.

다 먹고 성당 구경을 갔는데 보자마자 너무 웅장하고 멋있어서 눈을 뗄 수가 없었고 한동안 계속 바라보다가 사진도 여러 장 찍었다. 성당 근처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전망대가 있다고 들어서 가볼까 했는데 시간이 늦어서 포기하고 부부님과 우리 숙소에 가서 좀 더 얘기 나누다가 부부님은 가시고 우리끼리 더 얘기를 나눴다.

이런저런 얘기를 했지만 결론은, 이 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것과 이 시간이 참 그리울 것 같다는 얘기를 했다.


오늘은 출발부터 도착까지 너무 힘들었다.

걸을 때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이런 날씨에도 걷는 게 맞는 건지, 이렇게 걷는 게 의미가 있을지 등 많은 생각이 들었는데 무릎에 충격까지 받으면서 몸과 마음 모두 힘들었지만 도착하고 나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씻고 재정비를 하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힘들었던 게 싹 잊히면서 오늘도 무사히 도착했음에 감사하게 느껴졌다.

한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식과 비슷한 음식으로 점심, 저녁을 먹어서 오랜만에 제대로 식사를 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고 처음으로 우리만 있는 공간에서, 동행들과 사소한 얘기부터 진지한 얘기까지, 함께 나누고 같이 보내는 이 시간도 참 좋았다.

내일은 걷지 않고 처음으로 하루 쉬기로 했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고 뭘 하며 하루를 보낼지, 기분 좋은 고민도 했다.

내일 비가 온다고 하는데 제발 날씨가 좋길 바라고 충분히 푹 쉬고 몸도 마음도 편안하게, 하루를 잘 보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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