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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6일 차 : 걱정은 되지만, 행복했던 나

25.2km, 7시간 30분 걷기

by 베라노드림

오늘은 초반부터 오르막길의 연속이었다. 추울까 봐 여러 겹 옷을 입고 나왔었는데 걷다 보니 더워져서 옷을 벗고 정리하느라 뒤쳐져 혼자 올라가고 있었는데 오르막이 끝나는 지점에서 동행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최근 며칠 사이에, 어두운 길을 걷고 있을 때 잘 보이지 않아 더듬거리면서 가고 있으니 동행 중 한 명이 빛을 비춰주기도 했고 또 어느 날은 다른 동행이 일부러 내 뒤로 가더니 빛을 비춰준 적이 있었다.

오늘, 나를 기다리고 있는 동행들을 보니 그때 생각들이 나면서 동행들 덕분에 이 길을 무사히 걷고 있는 거 같아서, 도움을 많이 받고 있어서, 미안하면서도 너무 고마웠고 동행들의 존재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됐다.


기다려준 동행들 덕분에 같이 걷다가 내 무릎 상태가 걱정되어 천천히 걷다 보니 또 뒤처져서 혼자 걷게 됐고 다음 마을에 도착했는데 어느 카페에서 동행 한 명이 마중 나와 있었다.

내가 혹시나 모르고 지나칠까 봐, 마중 나와있던 그 마음이, 이뻤고 고마웠다.

카페에서 간단히 먹고 잠시 쉬다가 여기서부터 다 같이 출발했다. 동행들과 이야기하며 걷다 보니 웃음이 끊이질 않았고 그러는 사이 무릎 걱정도 잊혀갔다.


그렇게 또 같이 출발했지만 각자의 속도에 따라 따로 걷고 있었는데 저 멀리 푸드트럭이 보였다.

기쁜 마음에 푸드트럭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는데 가까이 다가가니 강이 보였고 멀리서 보던 것은 푸드트럭이 아니라 배였다.

계속 평지를 걷다가 잠깐 완만한 오르막길이 나왔고 그 길이 끝날 때쯤 마주했던 그 풍경은, 이 길을 걸으면서 가장 생각나고 가장 이뻤던 장면 중 하나로 손에 꼽는 장면이다.

그러나 혼자 걷고 있었다 보니 이 감정을 같이 공유할 사람이 없어서 아쉬웠는데 곧 동행들이 한 두 명씩 보이기 시작했고 그 이후로는 함께 걸으며 이 풍경을 즐겼다.

파란 하늘, 구름도 이뻤고 잔잔한 강 위에 배가 지나가는데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손까지 흔들어주고, 그리고 오랜만에 날씨까지 좋았던, 모든 게 완벽했다.

이 모든 것이 너무 이쁘고 좋아서, 이 풍경을 보고 있으니 너무 행복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고 앞으로 나가아가다 보면 이 길이 끝날 거고 그러면 이 풍경을 보지 못한다는 게 너무 아쉬워서, 조금 걷다가 멈춰 서서 보고 또 걷다가 멈춰서 보고 사진 찍고 이렇게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동행들과 이 풍경을 같이 보며, 행복하고 감동받은 내 감정을 공유할 수 있어서 너무 기뻤고 감사했다.


행복한 마음 가득 한 채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해서 공립 알베르게로 갔는데 너무 실망스러웠다.

가격은 어제 묵었던 한인 알베르게와 비슷해서 결코 저렴한 가격은 아니었는데 아직까지도 가격 대비 가장 안 좋았던 알베르게로 기억될 정도로, 시설이 너무 열악했기 때문이다.

도착하자마자 점심부터 먹고 씻고 빨래한 후 동네구경을 하러 나갔다.

사실 무릎이 안 좋아서 나갈까 말까 고민했는데 그냥 숙소에서 시간을 보내기엔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고 동네 구경도 해보고 싶어서 결국 나갔다. 천천히 동네 구경을 하다가 아까 걸을 때 너무 좋았던 풍경을 또 보고 싶어서 그쪽으로 다시 갔는데 다시 봐도 여전히 내 마음은 똑같이 느끼고 있었고 아쉬워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아쉬움을 뒤로하고 숙소로 가야 했다.

숙소로 가는 길에 갑자기 무릎이 아프고 불편해서 제대로 걸을 수가 없어서 절뚝거리며 겨우 숙소 근처까지 갔고 근처에 벤치가 있어서 앉아서 쉬었다.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로 무릎에 이상이 생긴 거 같아서 걱정스러웠는데 쉬다 보니 그나마 괜찮아져서 다행이었다.


오늘은 걷는 내내 너무 좋았다. 무릎상태가 걱정되긴 했었지만 적당한 바람과 햇빛, 오랜만에 티셔츠 하나만 입어도 될 정도로 춥지 않았고 그리고 무엇보다 걷는 내내 보는 풍경이 너무 이뻐서, 특히 숙소에 다 와갈 때쯤 보이던, 그 장면과 풍경은 뭐라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도 그때의 내가 너무 행복해하던 기억이 떠오를 정도로, 보는 내내 너무 좋았고 나를 기분 좋게 해 줬다.

매일 걸어도 매번 보이는 것,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게 다른 게 이 길만의 묘미인데 오늘은 '나는 이런 자연을, 이런 풍경을 좋아하는구나, 이런 모습을 보면 내 기분이 좋아지는구나'를 확실히 알게 된 하루였고 그리고 동행들이 지금 나한테 어떤 존재가 되고 있는지, 동행들이 있어 얼마나 든든하고 좋은지, 동행들에 대한 고마움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 주었다.

내일은 무릎이 좀 더 괜찮아지길 바라며, 내일도 오늘처럼 행복한 감정을 느끼며 걸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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