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km, 5시간 40분 걷기.
오늘부터 몇 일간은 따로 걷기로 했다.
동행 중 몇 명은 아침 일찍 떠났고 나 포함 나머지 동행들은 준비 후 각자 출발하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같이 출발했지만 이후 자연스레 몇 명씩 따로 걷게 됐고 나는 동행 1명과 같이 걸어가고 있었는데 걷다 보니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의를 입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하며 걷고 있는데 갑자기 우박같이 쏟아져서 급하게 우의를 입으려고 잠시 멈췄고 오늘부터 혼자 걷기로 했으니 혼자 걷고 싶은 마음에, 나보다 빨리 우의를 입은 동행에게 먼저 출발할 것을 권유했다. 그때부터 쭉 혼자 걸어갔다.
그러나 이때부터 너무 힘들었다.
어느 카페, 어느 건물 하나 보이지 않는 길을 계속 앞으로 쭉 걸어가야 했는데 어디가 끝인지도 모르겠고 끝날 기미는 보이지 않고 비가 내려 날씨까지 좋지 않았다.
걸어도 걸어도 풍경하나 변하지 않는 길을 제자리 걸음 하는 것처럼, 마치 내가 어느 게임 속 한 장면에 들어와 그 속에서 출구를 찾기 위해 혼자 고군분투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중간에 푸드트럭이 하나 있었지만 그냥 지나쳤었는데 거기서 쉬었다 왔어야 됐다며 후회가 됐지만 어쩔 수 없었다. 비가 와서 어디 앉아서 쉬지 못하고 계속 걸어야 해서 신체적으로도 힘들었지만 같은 길을 계속 걷고 있으니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이런 생각이 들면서 정신적으로도 너무 힘들었다.
그렇게 17km를, 3시간 반~4시간 정도 걸어가다 보니 마을이 나타났다.
아직 한참을 더 가야 마을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보여서 이 마을이 아닌 건가 했지만 다행히 마을이 맞았다. 어찌나 반갑던지.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바로 보이는 카페로 들어갔더니 순례객들로 넘쳐났다. 모든 순례객들이 나와 똑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먼저 도착한 동행이 쉬고 있어서 인사를 했는데 카페로 들어오는 내 표정이 너무 힘들어 보였다고 했다.
그만큼 진짜 힘들었다.
겨우 자리를 잡고 메뉴를 보는데 처음 보는 메뉴인, 바나나 케이크가 있어서 주문했다.
이 길을 걸으면서 처음으로 바나나 케이크를 먹어보는 거였는데 너무 맛있었다.
아직도 그날 맛있게 먹었던 바나나 케이크가 생각나는데 아마 앞으로도, 어디서든 그때 먹은 모습과 비슷한 바나나 케이크만 보면 이 날이 제일 먼저 떠오를 것 같다. 그만큼 내 기억 속에서 이 날은 절대 잊히지 않는, 잊을 수 없는 날이 됐다.
좀 더 쉬고 싶었지만 계속해서 들어오는 순례객들로 자리가 없어서 빨리 자리를 비켜줘야 될 것 같아서 다 먹고 바로 다시 출발했다.
그 이후로도 계속 혼자 걸어갔는데 비가 계속 내려서인지, 혼자 걸어서였는지, 아까 17km를 걷는 동안 너무 힘들어서였는지, 쉬고 걸었는데도, 힘든 길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힘들었다.
도대체 언제 도착할까 그 생각만 하며 걸었다.
빨리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하고 싶어 최대한 빨리 걸었더니 1시 좀 안 돼서 오늘의 숙소에 도착했다.
1시부터 체크인이 된다고 해서 이 숙소에서 같이 운영하고 있는 카페&바에서 맥주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힘들어서 그랬는지 맥주가 너무 마시고 싶었고 순식간에 잔을 비웠다. 그만큼 너무 맛있었다.
그렇게 잠시 쉬다가 체크인을 했다. 지금까지 숙소랑 비교하면 가격은 좀 있었지만 알베르게 시설이 너무 깔끔하고 마음에 들었다.
일찍 도착해서 시간적 여유가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밖에는 계속 비가 와서, 너무 추워서, 밖을 나갈 수가 없었고 동네 구경을 할 수가 없어서 너무 아쉬웠지만 그 대신 오랜만에 친구랑 통화했다.
오늘 너무 힘들었지만 씻고 나서 친구랑 오랜만에 통화를 하고 나니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괜찮아졌다.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으로 순례자 메뉴를 시켜 먹었다.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혼자 밥을 먹었던 것 같은데 매번 동행들과 시끌벅적하게 같이 먹다가 혼자 먹으니 너무 조용해서, 순간 기분이 이상했지만 그래도 혼자 있는 이 시간도 좋았다. 혼자서 점심을 맛있게, 배불리 먹고 침대로 돌아와서 일기도 쓰고 핸드폰도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 17km 구간을 걸을 때는 신체적 힘듦보다는 정신적으로 힘든 게 더 컸다.
길이 꺾이거나 오르막 또는 내리막 길도 없이, 똑같은 길을, 똑같은 풍경을 보며 일자로 쭉 걸어가야 했는데 이런 길을 몇 시간 동안이나 걸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동행들 없이 혼자여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순례길 걸으며 힘들었던 날들 중 손에 꼽히는 하루였고 더군다나 일찍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 구경도 못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하루를 보낸 거 같아 좀 허무한 생각도 들었고 아쉬웠다.
그리고 순례길 걸은 이후 처음으로 혼자 보내는 시간이었다. 따로 걷더라도 숙소에 가면 동행들이 항상 있었고 복작복작하고 시끄러웠었는데 오늘은 오로지 나 혼자라고 생각하니 심심하고 외로웠다. 밥 먹을 때까지만 해도 혼자 있는 시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밤이 되고 혼자 침대에 앉아서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여기 숙소 구조 상 블라인드를 내리면 독립적인 공간이 돼서 다른 사람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그런지 아무도 없는 곳에 진짜 혼자 있는 느낌이었는데 원래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혼자가 되니 동행들이, 복작복작하던 그 분위기가 많이 생각나고 그리웠다.
오늘로써 드디어 산티아고까지 반 정도 걸어왔다.
벌써 이렇게 오다니 믿기지 않고 아프면 어쩌나, 무릎 통증 때문에 걷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었던 일들이 일어나지 않아서, 내 몸이 잘 견뎌주고 있어서 너무 다행이었다.
앞으로도 아픈데 없이, 아프지 않고 무사히 산티아고까지 걸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