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km, 7시간 40분 걷기
어제는 비가 오고 날씨가 좋지 않았음에도, 혹시나 추울까 봐 입고 잤던 경량패딩을 벗을 정도로, 이 길을 걸으면서 제일 따뜻하게 잤던 날이었고 2번 정도 중간에 깨긴 했지만 평소에 비해 잘 잤던 날이었다.
오늘은 어제 헤어졌던 동행들을 만나기로 했다.
어제는 동행들 중 내가 제일 짧게 걷고 멈췄기에 동행들을 만나려면 오늘은 내가 제일 많이 걸어가야 했다. 처음으로 무려 30km 넘게 걸어가야 했는데 가방을 메고 걷기에는 힘들 것 같아서 가방을 도착지까지 보내주는 서비스를 이용하기로 하고 미리 예약해 두었다.
준비 후 7시 30분쯤 길을 나섰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두웠지만 마을을 지나갈 때는 가로등이 있어서 괜찮았는데 숲길로 들어선 순간, 불빛 하나 없이 칠흑같이 너무 깜깜했다. 헤드랜턴이 있다고 해도 전혀 밝지가 않았고 그 길을 걸어가려고 하니 무서웠다. 몇 번을 혼자 걸어가려고 시도했지만 너무 무서워서 다시 뒤돌아 나오기를 반복했고 아무래도 도저히 혼자는 못 갈 것 같아서 누군가 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다행히 저 멀리 불빛이 보였고 순례자가 나타났는데 어제 같은 알베르게에 묵었던 한국인이었다.
내 상황을 설명하면서 밝을 때까지만 같이 걸어 줄 수 있냐고 물었는데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혼자 걷고 싶을 수도 있는데 같이 걷자고 해서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너무 감사했다.
어제는 17km를 걷는 동안 너무 힘들었는데 오늘은 어제와 다르게 3~4km마다 마을이 나타났고 계속 얘기 나누며 걸어가서 그런지, 아니면 커브길도 있고 오르막도 있고 내리막도 있는 어제와는 다른 길이어서 그런 건지, 그것도 아니면 가방의 무게가 덜어져서인지 전혀 힘들지 않았다. 어제와 비슷하게 쉬지 않고 16km를 걸어왔는데도 너무 편하게 걸었다. 그렇게 걷는 도중 중간에 다른 한국분을 만났고 셋이서 같이 걷게 되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구글맵으로 찾으니 햄버거 파는 곳이 있길래 그 식당으로 들어갔다. 걷는 동안 비가 내리지는 않았는데 곧 비가 온다는 소식에 빨리 가야 될 것 같아서 조급했는데 햄버거 주문 후 나오기까지 너무 오래 걸려서 괜히 여기로 왔나 잠깐 후회했지만 햄버거를 먹어보고는 그 마음이 싹 사라졌다. 생각보다 너무 맛있었는데 양도 많았고 가격도 괜찮았다.
맛있게 먹고 셋이서 같이 출발했다. 두 분은 어디까지 가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왔던 거리보다 더 걸어가야 하는 상황이기도 했고 비가 올 것 같아서 걸음을 재촉하다 보니 같이 걸어왔던 분들과 자연스레 멀어졌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이 길이 끝날 때까지 그분들을 보지 못했다. 멀어지기 전에라도 인사를 하고 왔어야 했는데, 몇 번 뵌 분들이라 당연히 또 보겠지 했지만 이게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그게 너무 후회가 되고 아쉬웠다.
아무 생각 없이 걸음을 재촉하며 걷다 보면 내 앞에도 걸어가는 순례자가 없고, 내 뒤에도 나를 따라오는 순례자가 없이, 이 길에 혼자만 있는 순간이 많았는데 그럴 때는 무섭다가도 한편으로는 혼자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 순간을 즐기기도 했다.
한참을 걸어가던 중 저 멀리 누군가 앞뒤로 배낭을 메고 힘겹게 걸어가는 게 보였다. 누군가 하고 봤더니 친하게 지내던 외국인 순례자였다.
어디까지 가냐고 물었더니 나랑 목적지가 같았다. 너무 힘들어 보여서 앞에 메고 있는 작은 배낭이라도 내가 들어주겠다고 했는데 극구 사양하셨다. 몇 번을 물었지만 그래도 사양하셨다.
나는 힘들어 보여서 도움을 주려고 한 건데 상대방의 생각을 배려하지 못한 건 아닌지, 이 길을 걸으면서 본인만의 생각과 다짐이 있었을 텐데 괜히 내가 그걸 방해했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 불편하실까 봐 빠른 걸음으로 그분을 지나쳐 걸어갔다. 덕분에 나도 이 길을 걷는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었던 것 같다.
걷다 보니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고 걸음을 더 재촉했더니 생각보다 빨리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숙소에 도착하니 문 앞에 내 배낭이 보였고 무사히 도착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오늘은 동행 중 한 명과 개인실을 쓰기로 했다. 어젯밤에 동행이 먼저 제안을 했고 나도 한 번쯤은 개인실을 사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체크인 후 싱글침대 2개가 있는 방을 안내해 주셨었는데 라디에이터가 작동되지 않았고 그래서 각각 1인실로, 방 2개로 바꿔주셨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개인 화장실도 같이 있어서 순례길 걸은 이후 처음으로 독립된 공간에서 하루 머물 수 있었다.
씻고 쉬다가 저녁을 먹기 위해 동행들과 만났고 식당을 가기 전 슈퍼에 들려 내일 마실 물이랑 간단한 간식을 샀는데 사장님이 환한 미소로 막대사탕을 서비스로 주셨다. 막대사탕이 뭐라고 이 작은 선물에, 마음이 따뜻해졌고 그 마음이 너무 감사했다.
오늘 가장 기대했던 일정 중 하나였던 저녁식사.
이 동네에 한국 라면을 끓여주는 식당이 있다고 했고 그래서 걸으면서도 엄청 기대했었다.
그러나 주문을 하려고 하니 라면이 다 떨어졌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이 라면을 먹기 위해 오늘 힘들게 걸어왔는데... 며칠 전부터 설레며 기다렸는데 라면을 못 먹는다니 너무 슬펐다. 어쩔 수 없이 다른 메뉴를 고르고 있는데 식당 주인이 우리가 너무 불쌍해 보였는지 본인들이 먹으려고 남겨둔 순한 라면이 있다고, 그거라도 괜찮냐고 물어봐주셨고 우리의 대답은 당연히 yes였다.
다른 음식과 함께 순한 라면을 먹었는데 순한 맛 라면이라고 해도 오랜만에 먹는 라면은 너무 맛있었다.
모든 음식이 다 맛있어서 기분이 좋았고 동행들과 함께 얘기하면서 먹으니 더 좋았다.
어제 하루, 혼자 있었고 하루 만에 다시 만났는데 이 분위기가 너무 그리웠는지, 맛있는 거 먹고 얘기 나누는 이 시간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졌다.
오늘은 어제보다 많이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순례길 걸은 것 중 아마 제일 긴 거리를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제보다 훨씬, 몸과 마음이 편안했다. 출발할 때는 비록 무서웠지만 같이 걸어줬던 한국인 순례자분께 너무 감사했는데 제대로 마지막 인사를 못해서 아직도 아쉬운 생각이 든다. 다시 못 볼 거라고는 생각 못했기에, 계속 마주치던 분이니까 또 보겠지 했던 게, 당연하게 생각했던 게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이번 일을 계기로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또 오늘 처음으로 30km 이상을 걸었다. 오늘은 가방을 도착지까지 보내주는 서비스를 맡겼었지만 한 번쯤은 10kg 정도 되는 내 배낭을 메고 30km 이상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내 체력을 보면 무리인 것 같고 그러나 한 번쯤은 도전해보고 싶고, 마음이 왔다 갔다 해서 어떻게 할지 고민이다.
어제는 동행들 없이 혼자여서 너무 쓸쓸했는데 오늘은 혼자만의 공간에서 쉬더라도 동행들과 함께 맛있는 거 먹고 얘기 나누며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어제와는 여러모로 많이 다른 오늘이었지만 내일은 오늘과 다르지 않기를, 오늘과 같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