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km 4시간 30분 걷기
혼자 자는 거라 한 번도 안 깨고 잘거라 생각했는데 깨는 건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많이, 2시간 간격으로 깼는데 추워서 그랬던 건지 잠을 제대로 못 잤다.
간단히 아침을 챙겨 먹고 있는데 비바람 소리가 너무 심해서 오늘 걸을 수 있을까 걱정을 하고 있던 중 다른 숙소에 머물렀던 동행들에게서 8시쯤 나갈 거라는 연락이 왔다. 그러나 8시가 되어도 비바람 소리가 너무 심해 도저히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고 그래서 좀 더 기다려보기로 하고 동행들을 먼저 보냈는데 시간만 흐를 뿐 변화가 없었다. 이대로 마냥 기다릴 수는 없을 것 같아서, 같은 숙소에 머물고 있던 다른 동행은 나보다 더 늦게 출발한다고 해서 그냥 출발했다.
마을을 벗어나기 직전 길을 한번 잃었고 겨우 제대로 된 길을 찾아서 걷기 시작했는데 비바람에 눈도 못 뜨겠고 비 때문에 물이 범람해 길이 없어져서 어쩔 수 없이 차도로 걸어가야 했다.
비가 퍼붓다가 잠잠해졌다가 또 퍼붓다가를 반복했고 12km 정도를, 거의 3시간을 혼자서 걸었다.
날씨도 안 좋은데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 제자리 걸음 하는 것처럼 계속 직진만 해야 했고 함께 걷는 사람도,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이 걷다 보니 너무 힘들었다.
며칠 전, 이런 길을 17km 정도 걸을 때보다 몇 배는 더 힘들었다.
비바람에 땅만 보고 걷다 보니 이런 날씨에도 걸어가야 하는 게 맞는 건지, 잘하고 있는 건지 수백 번, 아니 수천번 생각했다.
3시간 만에 마을에 도착해서 카페에 들어갔는데 먼저 출발했던 몇 명 동행들이 휴식을 끝낸 후 길을 나서려고 준비 중이어서 짧게 인사 나눈 후 헤어졌다. 주문을 하고 자리에 앉으려고 보니 동행 한 명이 카페에서 쉬고 있는 게 보였고 너무 반가웠지만 반가워할 힘도 없었는데 동행도 나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인사만 주고받고 그 옆에 앉아 따뜻한 차로 몸을 녹이고 빵을 먹으며 쉬었는데 너무 힘들어서 쉬어도 쉬는 게 아닌 것 같고 아무 생각 없이 멍한 상태로 먹기만 했다. 동행이 옆에 있지만 이야기를 나눌 힘도 없이, 너무 지친 상태였다.
휴식을 취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는데 또 계속 직진해야 되는 길이었다.
순례길은 이미 물바다가 돼서 도로로 걸을 수밖에 없어서 위험했고 오늘따라 가방도 무겁게 느껴지고 무릎보다 허벅지가 아팠지만 그래도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숙소까지 겨우 걸어 1시쯤 도착했다.
진이 다 빠져서, 너무 힘들어서 우의 벗는 것도 힘들어하고 있으니 먼저 도착한 동행이 도와줬는데 너무 고마웠다.
오늘은 짧은 거리를 걸어서인지 빨리 도착했었고 씻고 빨래를 돌리고 나서도 시간 여유가 많았다. 방에 있자니 너무 춥기도 하고 마냥 쉬고 싶지는 않아서 알베르게에서 같이 운영하고 있는 카페로 갔다.
밖은 아직 비가 와서 날씨가 좋지 않은데 나는 실내에서 따뜻한 핫초코 한잔 마시며 몸을 녹이고 있고 바깥구경도 하며 일기를 쓰고, 오랜만에 전 직장 동료와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얼마나 웃었던지.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순간이 아직도 많이 생각난다.
한참을 카페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던 도중 이 길을 지나가고 있던, 친하게 지내던 다른 순례자에게서 한 가지 놀랄만한 소식을 들었다.
뒤늦게 오던 동행 한 명이 오늘 이 마을을 지나쳐 훨씬 더 멀리 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원래 우리가 알고 있던 건, 우리가 머물고 있는 전 마을. 그러니까 아까 카페에서 쉬어갔던 그 마을에 머문다고 했었기에, 그러면 오늘 짧은 거리를 걷는 거라서 그래서 늦게 출발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걷다 보니 마음이 바뀐 건지 아니면 출발할 때부터 생각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40km를 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이 믿기지 않아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있는데 마침 그 동행이 지나가고 있어서 사실 확인을 해보니 맞다고 했다.
이미 오후 시간이었고 아직 한참을 더 걸어가야 되는 상황이었는데 멀리 간다고 해서 걱정되었다.
어제, 저녁을 먹으면서 동행들과 한 번쯤은 40km 정도를 걸어보고 싶다는 이런 얘기를 잠깐 했었는데 나는 비가 많이 온다는 말에 포기했었다. 그러나 그 동행은 진지하게 생각을 했었나 보다.
나는 날씨 때문에, 그리고 내 체력을 믿지 못해 포기했던 일이었는데 동행은 한국에서는 못하는, 비 오는 날 고생하며 걸어보고 싶었다며 오늘이 그날인 거 같다고 말하는데 나보다 어리지만, 이런 생각을 하고 실행에 옮긴다는 게 너무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궂은 날씨에 걷는다고 하니 걱정되면서도 걸으면서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싶길래, 어떤 힘듦이 있었길래 그러고 싶었을까 생각하니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
그 동행이 멀어져 가는 걸 지켜본 후 창가 쪽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점점 날이 개고 있었다.
오전까지만 해도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점점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고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바깥 풍경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걸 보고 있으니 마음이 몽글해졌고 기분 좋게, 변해가는 풍경을 한참 동안 하염없이 바라봤다.
오늘 40km를 걷겠다는 동행도 점점 좋아지는 날씨를 보며 얼마나 기분 좋게 걸을까 생각했고 힘들어하지 않고 행복하게 걸을 수 있기를 바랐는데 다행히 무사히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아서 안심되었다.
오늘은 얼마 걷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초반부터 강하게 몰아쳤던 비바람 때문에 모든 에너지가 빠르게 고갈된 느낌이었고 그래서 너무 힘들었는데 이런 날씨 속에서 40km를 걸어간 동행이 너무 대단하고 존경스러웠다.
한편으로는 난 왜 지레 겁먹고 실천하지 않았을까 후회되기도 했고 나도 언젠가는 이 길이 끝나기 전에, 배낭을 도착지까지 배달해 주는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고 내 짐은 내가 짊어지고 40km 정도 걸어보며 내 체력과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더 확고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