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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1일 차 : 행복했던 하루, 가까워지는 이별

18.8km, 5시간 걷기

by 베라노드림

오늘은 산티아고 도착 전, 마지막 대도시인 레온으로 가는 날이다.

여기서도 마지막으로 한 템포 쉬어가기로 했고 맛있는 거 먹고 쉴 생각에 너무 설렜다.


어제도 자다가 새벽에 몇 번 깼고 더 자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원래 동행들과 같이 출발하려 했는데 잠도 안 오는데 누워있기 싫어서, 그리고 한편으로는 아무도 없는 새벽에 혼자 걸어보고 싶기도 해서 먼저 준비하고 혼자 길을 나섰다. 막상 길을 나섰지만 너무 깜깜했고 무서워서 못 걸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뒤따라오던 순례자가 보였고 마을을 벗어나도 도로 옆을 걷는 거라 자동차 불빛이 있어서 무섭지 않게 걸을 수 있었다.

분명 혼자 걷고 싶어 나온 건데 너무 어두워서 혼자 걷는 게 무섭게 느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지만 한 번쯤 어스름한 새벽에 혼자서 걷고 싶었기에, 걷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걷다 보니 점점 주변이 밝아오면서 분홍빛으로 변해가는 하늘을 보며 더 기분이 좋아졌고 오늘 날씨는 좋겠다 싶었다. 분명 일기예보에는 비가 온다고 했었는데 이런 하늘을 보니 일기예보가 틀린 게 아닐까, 제발 틀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기분 좋은 마음 한가득 안고 걷고 있다가 우연히 뒤를 돌아봤는데 저 멀리 동행 중 한 명이 뒤따라 오고 있었다. 혼자 걷고 있어도 좋았는데 동행이 뒤에 있으니 든든한 마음이 들어서 이것 또한 좋았다.

그런데 갑자기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에 9시쯤 비가 온다고 했었지만 분명 분홍빛 하늘을 봤고 먹구름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는데 또 비라니.. 일기예보가 정확했다.

중간에 멈춰서 우의를 입고 걸었는데 그나마 바람이 불지 않아 다행이었다.


오늘 기대했던 일정 중 하나인, 맛있는 빵집 가서 빵을 먹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부터 저장해 뒀던 빵집이 있었는데 맛있다고 해서 꼭 가고 싶었다.

그 빵집은 순례길 방향과는 조금 달라서 헤매다가 겨우 찾아서 들어갔는데 그동안 보지 못했던 빵 종류가 많았고 심지어 가격이 너무 저렴했으며 지금까지 카페에 들러 먹었던 빵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이곳에는 순례자는 거의 보이지 않았고 마을 주민들만 북적이는 걸로 보아 진짜 동네 맛집인 것 같았다.

먹고 싶은 것도 많고 종류가 너무 많아서 뭘 먹을지 행복한 고민을 했고 고심 끝에 2개 골랐다. 고르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크림빵만 골랐는데 너무 맛있었고 맛있는 걸 먹으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다 먹고 나왔는데도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분명 내 앞에, 가까이에는 온통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인데 저 멀리 맑고 파란 하늘이 조금 보였다. 살면서 처음 보는 하늘이었다.

신기한 하늘 모습에 제발 비가 그치고 먹구름에서 온통 파란 하늘로 변하길 바라며 걷고 있는데 생각보다 빨리 변하고 있었고 변해가는 하늘을 보니 너무 설렜다.

가고 싶었던 빵집에 가서 맛있는 빵을 먹고 기분 좋게 출발했고 다시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먹구름이 보이던 하늘에서 파란 하늘로 변해가는 이 순간을,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싶었다.

어제 혼자 멀리 갔던 동행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몇 시간을 비바람을 뚫고 걷다가 맑고 파란 하늘을 봤으니 기분이 어땠을까,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기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 행복했겠다 싶었다.


그렇게 레온 입성까지, 설렘 가득하고 행복하게 걸어갔다.

역시나 대도시에 들어서면 다 와갈 듯한데 아직은 멀었고 대도시안에서만 1시간 넘게 걸어야 해서 힘든데 레온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다른 도시들에 비해서는 덜 힘들었다. 맛있는 빵을 먹고 좋아진 날씨를 보며 너무 행복하게 걸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점심으로는 일식뷔페서 먹기로 했는데 오픈 시간보다 너무 일찍 도착해서 디저트 맛집을 찾다가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서 근처에 있던 가게에 들어갔다. 내가 좋아하는 쫀득한 젤라토였는데 한입 먹자마자 기분이 좋아지는 맛이었다. 너무 맛있었고 아이스크림 먹으며 식당 오픈 시간을 기다리는 그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오픈 시간쯤 동행들이 모였고 며칠 전 헤어졌던, 산티아고 도착 전까지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던 동행들이 여기서 연박하고 있었기에 같이 만나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오랜만에 먹는 아시안 음식이라 좋았고 며칠 만에 동행들이 다 모여서 더 좋았다.


여기서도 하루 더 머물기로 해서 독채를 빌렸고 밥 먹고 숙소 가서 짐 정리하고 씻고 빨래 후 저녁은 해 먹기로 해서 장 보러 다 같이 갔다.

저녁으로는 동행이 해준 파스타와 마트에서 샀던 치킨, 샐러드를 먹었는데 오랜만에 다 같이 모인 거라서 시끌벅적했다. 맛있는 거 먹으며 얘기를 나누는, 이 분위기가 너무 그리웠었다.

그러나 오늘 잠시 다시 만났던 동행들은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는 채로, 그들은 내일 다시 길을 떠나야 했기에 일찍 헤어졌다. 오늘 볼 수 있어서 좋았는데 산티아고 도착까지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쉽고 벌써 그리웠다.

그들을 떠나보내고 남은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지만 또 결론은 서로의 계획이 있었는데도 그걸 바꿔가면서 까지 이렇게 함께 하는 지금이 너무 소중하다고, 절대 잊을 수 없을 거 같다고 그리고 너무 그리울 것 같다고 했다.

이제 산티아고 도착까지 대략 12~13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 말은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였고 그 생각을 하니 또 슬퍼졌으며 동행들과 함께한 지금 이 시간이 나중에 아주 많이 그리울 것 같다. 혼자 걷고 생각하려고 떠나온 이곳에서 소중한 인연들을 만났고 이 인연들과 헤어질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게, 걸을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아쉬움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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