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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4일 차 : 행복했다가 걱정스러웠다가

26.2km, 8시간 걷기

by 베라노드림


오늘은 아침부터 너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제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고 그로 인해 준비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갑작스러운 내 몸의 변화로 내 기분이 이런 상태라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동행들에게 먼저 출발하라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느긋하게 준비 후 나가려는데 예상치 못하게, 로비에서 동행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꽤 오래 기다렸을 텐데 너무 미안했지만 한편으로는 고마웠다. 분명 기분이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동행들에게 먼저 가라고 한 건데 동행들을 보자마자 기다려준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나를 생각해 준 마음이 너무 감동적이어서 내 마음도 금세 괜찮아졌다.

동행들은 그렇게 나의 마음까지 영향을 미치는, 힘이 되어주는 존재였다.


어둠 속을 걸어가던 중 해가 떠올랐고 오랜만에 비가 오지 않아서, 구름 한 점 없이 햇빛 쨍쨍한 맑은 하늘을 봐서 걷는 동안에도 기분이 좋았다.

아침을 먹지 않고 출발했었기에 걷다 보니 배가 고팠고 마을을 지나쳐가니까 당연히 카페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지도상으로는 카페가 있다고 나왔는데 가서 확인해 보니 문이 닫혀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을 둘러봤지만 먹을 수 있는 곳이 없어서 계속 걸을 수밖에 없었고 출발한 지 3시간이 지나서야 큰 마을이 나와서 카페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기다렸던 마음과는 달리, 마땅히 먹을만한 게 없었고 그중에서 그나마 맛있어 보이는 빵을 먹고 음료를 마시며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출발했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무릎이 아닌, 걷기 힘들 정도로 오른쪽 발목이 아팠다. 너무 당황스러웠지만 일단은 걸어야 했기에 최대한 천천히 걸었는데 조금 괜찮아지는가 싶더니 다시 안 좋아지고 또 괜찮다 싶었는데 다시 아파오는, 이런 상태가 계속 반복됐다.


그 상태로 걷던 중 어느 마을에 도착했는데 작은 마을인 줄 알았는데 계단을 쭉쭉 올라가 보니 다른 세상이 펼쳐진 것처럼, 생각보다는 제법 큰 도시가 나왔다.

큰 마트가 있어서 각자 필요한 걸 사고 마트 근처에 있던 광장에서 잠시 쉬었다. 보통 순례자들이 이곳에서 하루 머물지만 우리는 지나쳐가는 곳이었는데 그냥 이대로 지나쳐가기엔 너무 아쉬울 것 같아서 카페에서 잠시 쉬었다 가려고 괜찮은 카페를 찾아서 들어갔다.

순례길 걸은 이후로 처음으로, 한국과 비슷한 감성의 카페였는데 디저트 메뉴가 다양했고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메뉴들이라 너무 설렜다. 고민 끝에, 와플과 츄로스를 시켰고 각자 마실 음료를 시켰다.

오랜만에 이런 곳에 와서 맛있는 디저트를 먹으니 기분이 너무 좋아서 여기서 이 기분을, 여유를 더 느끼고 싶었지만 다시 출발해야 했다.


다행히 오랜만에 날씨가 좋았고 걷기에는 괜찮은 조건이었지만, 내 발목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최대한 천천히 걸었는데 다 와갈 때쯤에는 발목이 더 아팠고 비까지 내려서 마지막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늘은 기부제 알베르게에 머물기로 했다. 특이한 형태의, 처음 보는 구조와 인테리어여서 신기했고 직원들도 너무 친절해서 마음에 들었다.

침대를 정하고 짐 풀고 씻고 나왔는데 비가 퍼붓고 있었다. 비 때문에 마을 구경을 할 수 없어서 너무 아쉬웠는데 한편으로는 오늘 발목이 안 좋았으니 차라리 잘 됐다고, 쉬는 게 나을 거라고 스스로 위로했고 그렇게 생각하니 그나마 덜 아쉬웠다.

비가 오니 너무 추워서 따뜻한 난로 앞에서 몸을 녹이며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을 먹었다.

저녁도 기부제로 운영되고 있었고 순례자들과 다 같이 먹었다. 채식주의 음식이었는데 맛은 나쁘지는 않았지만 분명 양껏 먹었는데도 이상하게 배가 부르지 않았다.

채식메뉴를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 특별한 경험한 것으로, 1번 경험한 걸로 충분한 것 같다.


오늘은 아침부터 기분이 너무 좋지 않은 상태로 출발했지만 동행들 덕분에, 좋았던 날씨 덕분에, 오랜만에 이쁜 카페에서 맛있는 디저트를 먹어서 기분 좋게 걸으며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또한 새로운 형태의, 특이했던 알베르게에 머물 수 있어서, 채식주의 메뉴도 경험해 볼 수 있어 좋았지만 발목 통증과 갑작스러운 내 몸의 변화가 걱정되어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했는데 내일은 걱정했던 모든 게 다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내일도 행복하게 걸을 수 있기를 바라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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