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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5일 차 : 기뻤지만 기뻐하지 못했던 하루

35.8km 11시간 30분 걷기

by 베라노드림

원래 오늘은 17km까지만 가려고 했다.

비수기에 접어들다 보니 오픈하지 않는 알베르게가 많았고 그러다 보니 오픈하는 곳에 맞춰서 걸을 수밖에 없었는데 오늘은 17km 아니면 35.8km를 걸어야 되는 상황이었다. 17km까지만 가는 건 너무 짧게 걷는 것 같았고 그렇다고 35.8km까지 가려고 하니 다들 힘들 것 같다고 해서, 17km만 걷기로 하고 느긋하게 출발했다.


동행들과 17km만 걷기로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오늘 더 멀리 가볼까?, 동행들이 안 가더라도 혼자 좀 더 걸어볼까?, 며칠 전부터 생각했던 도전을 오늘 실천해 볼까?’ 등 이런 생각을 했는데 아무래도 17km까지만 걷는 건 너무 짧아서 아쉬울 것 같았고 게다가 17km 마을에는 알베르게가 몇 개 없는데 그 몇 개 없는 알베르게 중에서도 괜찮은 사립 알베르게는 예약을 하지 않아서 못 갈 것 같았고 그렇다면 공립 알베르게를 가야 했는데 거기는 따뜻한 물이 안 나온다는 후기가 많아서, 어제도 찬물로 씻을 수밖에 없었는데 오늘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아서 동행들 모르게, 혼자 어디까지 갈지 고민하며 걸었다.


오늘은 가는 길에 한국 라면을 먹을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해서 설레며 걸었는데 식당에 도착하니 라면이 다 팔려서 없다고 했다. 너무 아쉬웠지만 그래도 뭐라도 먹어야 했기에 다른 메뉴들을 보는데 기대했던 라면을 못 먹어서 그런지 먹고 싶은 메뉴가 없어서 대충 샌드위치를 시켰고 입맛이 없었지만 겨우 배를 채운 후 느긋하게 쉬다가 다시 출발했다.


17km 목적지까지 계속 오르막길이라고 해서 긴장했었는데 생각보다 가파른 오르막이 아니라서 힘들지 않았다. 나랑 동행 1명이 계속 같이 걸어서 먼저 도착했고 카페에서 쉬며 다른 동행들을 기다렸다.

카페 겸 알베르게를 같이 하는 곳이었는데 주인이 너무 친절하셨다. 한국말로 인사해 주시고 말도 걸어 주셨는데 한국인이 많이 온다고 한국말을 배웠다며, 한국말로 대화하려고 노력하시는 그 마음이, 나도 이런 마음가짐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멋있었고 감동이었다.

카페 주인도 좋았는데 그동안은 보지 못한 메뉴였던 애플파이도 너무 맛있었다.


먹고 쉬면서 동행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17km를 걸어오면서,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내 몸의 이상 변화에도 어제처럼 기분이 안 좋게 느껴지는 게 전혀 없었고 내 발걸음이 너무 가볍게 느껴졌고 가방의 무게도 느껴지지 않았고 생각보다 힘들지 않아서, 너무 일찍 도착하니 뭔가 아쉬워서 걸으면서 계속 고민했던, 그 도전을 해보기로 결정한 후에 나와 함께 있던 동행에게 말했는데 그 동행도 더 걷겠다고 했고 어쩌다 보니 모두 다 같이 36km까지 가기로 했다.

일단 알베르게에 자리가 있는지 중요했기 때문에 급하게 36km 지점에 있는 알베르게에 전화해서 확인했는데 다행히 자리가 남아있어서 그 자리에서 숙소를 예약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우리가 뒤늦게 멀리까지 가기로 결정을 해서, 오후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지금까지 온 거리만큼 더 걸어가야 하기 때문에 갈 길이 멀어서 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걷다 보니 “철의 십자가”라는 곳에 도착했다.

보통 여기는 새벽 혹은 아침에 지나가는 길인데 우리는 오후에 이곳을 지나치게 됐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경건해지는 마음이었고 적혀 있는 메모들을 하나하나씩 보는데 각자 다양한 사연으로, 이곳에 와서 글을 남겼을 텐데 짧은 글귀만 봐도 어떤 사연들인지 짐작할 수 있었고 그 글들을 보다 보니 눈물이 나올 뻔했다. 오래 머무르면 기분이 가라앉고 슬플 것 같아서 서둘러 출발했다.


철의 십자가를 지나서 가는 길부터는 내리막길이 시작되어 다음 마을까지 12km를, 계속 내려가야 했다.

내리막인 것도 힘든데 돌도 많고 길이 험하고 너무 위험해 보였다. 안 그래도 위험해 보이는 길인데 계속 내린 비로 땅이 젖어 있는 곳이 많아 질퍽했고 물이 고여있는 곳도 많아서 걷는 게 쉽지 않았다. 최대한 천천히,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그러나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려가다 보니 경치가 한눈에 다 들어왔는데 그 경치만큼은 너무 이뻤고 오늘 비가 오지 않아 너무 다행이어서, 그리고 내 옆에 함께 걸어주는 동행이 있어서 힘들지 않게 걸을 수 있었다.


12km를 걸어 겨우 마을에 도착했고 너무 시원한 게 마시고 싶었고, 쉬고 싶었는데 비수기라 그런지 아니면 우리가 오후 늦게 도착한 건지 열려 있는 카페가 하나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마을에 있던 벤치에서 쉴 수밖에 없었다.

지도상으로는 1시간 정도 걸어가야 다음 마을이 나온다고 되어 있었는데 이 1시간을 걸어가는 길도 만만치 않다.

내리막길이었는데 급경사 내리막길이라서 위험했고 길도 좋지 않아서 여기서도 조심스럽게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다음 마을이 나왔고 다행히 열려있는 카페가 있었다.

너무 쉬고 싶었는데 드디어 쉴 수 있게 됐고 맛있는 맥주와 감자칩을, 야외에 앉아 자연을 느끼고 이쁜 풍경을 보며 먹고 있으니 참 기분이 좋았다.

쉬고 있으니 다른 동행들도 도착했고 얘기 나누다가 갑자기 지금 시간이 6시쯤이라는 걸 깨닫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앞으로 4km를 더 가야 되는 상황이었는데 곧 해가 질 것 같았고 그러면 어둠 속을 걸어야 하니까, 위험하기 때문에 서둘러 길을 나섰다.


남은 4km도 또 내리막길이었는데 이 길 또한 너무 위험해 보였다.

곧 해가 질 것 같아서 마음은 급한데 길은 위험하고, 그래도 다치지 않기 위해 조심히 내려갔다.

동행들과 같이 출발했지만 어쩌다 보니 따로 걷게 되었고 나와 동행 1명이 앞장서서 걸었다. 알베르게를 예약해 두었는데 늦게 도착한다는 말을 안 한 상태여서 왠지 불안했고 먼저 빨리 알베르게에 도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10분 전까지만 해도 해가 떠 있었는데 생각보다 해는 더 빨리 졌고 그 이후 깜깜한 산속을 내려가야 했다. 어두워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거대한 산속에 둘러싸여 있는 느낌이었는데 물소리는 들리는데 보이지는 않고 불빛 하나 없는 길을 걸으려니 무서웠지만 동행이 핸드폰 불빛으로 비춰줘서 그나마 무섭지 않게 걸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내리막길이고 아무리 핸드폰 불빛이 있더라도 일부만 보이다 보니 몇 번이고 미끄러지며 내려갔다. 위험한 순간들이 많았다.

앞장서서 먼저 걸었지만 뒤따라오던 동행들이 보이지 않아 걱정되었는데 일단 우리라도 먼저 숙소에 도착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빠른 속도로 걸었고 걸으면서 동행들에게 너무 미안한 생각이 많이 들었다.

내가 여기까지 가겠다고 해서 모두를 다 위험에 빠뜨린 건 아닌지, 뒤에 따라오는 동행들은 더 어둠 속에서 내려올 텐데, 위험할까 봐 걱정스러웠고 무사히 잘 내려오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걷다 보니 저 멀리 마을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는데도 불구하고 가도 가도 마을은 나타나지 않아서, 다 와 가는 듯한데 아직 마을은 나타나지 않는, 그 순간이 정신적으로 가장 힘들었다.

동행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 무서움과 긴장감으로 걷다 보니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얼마나 기쁘던지, 마지막에 어둡고 위험했던 길을 걷느라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간 상태였는데 긴장이 풀리면서 마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잔잔한 물이 흐르고 있고 다리가 보이고 불빛이 반짝이는, 내가 좋아하는 모습이었고 너무 이뻐서 눈을 뗄 수 없었으며 드디어 도착했다는 생각에 내 마음도 편안해졌다.




마을 입구에서 알베르게까지 좀 걸어가야 해서 7시가 넘어서야 겨우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알베르게 주인이 왜 이렇게 늦었냐고 늦으면 늦는다는 연락을 했어야 하는데 왜 안 했냐고 말하셔서 순간 우리 자리가 없는 줄 알고 걱정했는데 다행히 우리를 믿고 우리 자리를 남겨 주셔서 너무 감사했고 죄송했다.

계속 죄송하다고 사과하니 괜찮다고 “no problem’이라고 해주셔서 마음이 놓였다.

뒤늦게 다른 동행들이 도착했는데 다들 너무 힘들어 보였지만 다행히 아무도 안 다치고 무사히 와줘서 너무 고마웠다.


오늘은 나도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분명 어제 갑작스러운 몸의 변화로 기분이 안 좋았고 그 몸의 변화는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 내가 느끼는 내 몸 상태는 날아갈 듯이 가벼웠고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한 번쯤 도전해보고 싶었던, 가방 메고 40km 정도 걷기를 시도할 수 있었다.

계속 생각만 하던 다짐을 실천했는데 잘할 수 있을까 걱정했던, 자신 없었던 마음과는 다르게 잘 해냈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약하지 않구나 잘할 수 있구나'를 느끼며 나 자신에 대해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되고 기뻤지만 마냥 기뻐할 수 없었던, 동행들에게 너무 미안한 날이었다.

강요는 아니었지만 강요로 된 것 같아서, 괜히 힘들게 한건 아닌지, 위험하게 걷게 한 건 아닌지 자꾸 그 생각이 들어서 너무 미안했는데 동행들은 오히려 나를 위로해 줬고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그래도 미안한 마음이 계속 들어서, 이걸 잘 해냈다고 생각하는 게 맞는 건지 의심스럽기도 했고 잠들기 전까지도 마음 한 구석이 너무 불편했다.

그래도 아무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도착했음에, 이런 동행들을 만날 수 있었음에 너무 감사하고 내가 몰랐던 나 자신에 대해 조금은 더 알 수 있었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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