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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26일 차 : 소소한 일상이 특별하게 느껴진

22.9km, 7시간 걷기

by 베라노드림

어제 무리를 해서 오늘은 조금만 걸으려 했는데 다음 일정을 생각하다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걸어야 할 것 같아서 23km를 걷기로 했다.

아침에 빨래 문제로 조금 늦어져서 처음으로 9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출발하게 됐는데 어쩌다 보니 어제는 제일 늦게 도착해서 민폐를, 오늘은 제일 늦게 나와서 민폐를 끼치게 됐고 우리 때문에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가 안 좋아질까 봐 살짝 걱정이 되었다.


오늘은 동행 중 한 명의 발목 상태가 좋지 않아 걷는 게 힘들어 보였고 많이 뒤처져 있었다.

어제 너무 많이 걸어서, 무리를 해서 그런 거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괜찮은지 계속 확인하며 물어보기보다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나도 천천히 걸으며 부담스러워하지 않도록 나름의 방법으로 배려했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큰 도시에 도착했다. 여기서 아침을 먹기로 하고 괜찮은 카페를 찾았는데 순례객들은 거의 보이지 않고 현지인들만 북적해서 동네 맛집 같았고 카페 분위기도 좋았다.

메뉴판을 보니 메뉴도 많고 맛있어 보이는 게 너무 많아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팬케이크로 결정했다.

보기에도 너무 이쁜데 맛있어서 기분이 좋았고 느긋하게 쉬다가 다시 출발했다.


오늘은 걷기에 날씨가 좋았고 내 몸 상태도 괜찮았다.

걸으면서 친구랑 통화도 했는데 오랜만에 근황을 주고받으니 너무 좋았고 내 목소리가 밝아 보인다고 다행이라고 친구가 말해줘서, 내가 생각보다는 잘 해내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11월이 되면서 비수기에 접어들었고 문 닫는 알베르게가 많아서 아침에 출발할 때 전화로 미리 예약예약했었다. 2~3시쯤 도착한다고 말했었는데 이 상태로라면 4시는 넘어서 도착하게 될 것 같아서, 어제와 같은 상황이 발생하지 않게, 동행들에게 부담 주지 않기 위해 나 혼자 걸음을 재촉했다.

빠른 걸음으로 가고 있는데도, 비가 약하게 내리고 있어 흐린데도 불구하고 알록달록한 색깔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요정이 나올 것 같은, 요정 마을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빨리 가야 하는데도 풍경이 너무 이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오늘의 알베르게에 도착했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너무 당황스러워 전화를 했는데 곧 오신다고 잠깐 기다려 달라고 했다.

오늘 이 숙소는 우리 동행들만 예약했다며, 합리적인 가격으로 우리끼리 묵을 수 있는 방을 안내해 주셨고 숙소 사장님도 여기서 머물지 않으셔서 오늘 이 건물에, 우리만 있게 됐는데 이런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된 것도 신기했다.


오늘 이 마을에는 한국라면을 끓여주는 식당이 있다고 해서 기대하며 왔었고 저녁 오픈 시간만을 기다렸다.

어제는 먹지 못했던 라면을 오늘은 꼭 먹어야만 했고 만약 먹지 못한다면 너무 아쉽고 미련이 남을 것 같았는데 정말 다행스럽게도 오늘은 먹을 수 있었다.

물이 좀 많은 라면이었지만 그래도 타국에서 냄비에 끓인 라면을 먹어서, 거기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김치까지 먹을 수 있어서 너무 만족스러웠다. 아침에 팬 케이크만 먹고 그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배가 고파서 그랬는지, 아니면 오랜 기다림 끝에 먹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감동적이었고 더 맛있게 느껴졌다.


오늘은 어제의 여파로 동행의 발목이 안 좋은 거 같아서, 불편한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동행의 발목 상태가 더 악화되거나 걷기에 무리가 갈 정도는 아니라서 조금이나마 마음의 부담을 덜 수 있었다. 그리고 걷기에 날씨가 좋았고, 우연히 찾은 카페에서 맛있는 팬케이크를 먹었고, 오랜만에 친구랑 통화도 하고, 요정이 나올 것 같은 그림 같은 풍경을 보고 게다가 마무리로 한국 라면까지 먹을 수 있었던, 소소한 일상들이 더해져 특별하게 느껴진 행복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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