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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7일 차 : 맑았다가 흐렸다가 내 마음도

25.1km, 7시간 30분 걷기

by 베라노드림

새벽에 비가 퍼붓는 소리에 잠에서 깼고 오늘 걸을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아침에 출발할 때는 비가 오지 않았다. 그러나 걷다 보니 비가 점점 더 많이 내리고 바람까지 불었는데 이런 상황에 적응이 된 건지, 아니면 비가 더 많이 내리거나 바람이 많이 불지 않아서 그런지 걷는 건 괜찮았지만 비가 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분은 좋지 않았다.


오늘은 tv 프로그램 <스페인 하숙>에 나왔던 마을을 지나가게 됐다.

출발한 지 2시간 정도 지나서 그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마을에 도착할 때쯤, 비가 그치면서 파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덕분에 마을 구경은 잘할 수 있겠다 싶었고 기분이 좋아졌다.

그 프로그램에 나왔던 광장과 알베르게는 순례길 방향과는 반대였지만 마침 비도 그쳤고 구경하고 싶어서 돌아가더라도 그쪽으로 갔다.

약간 헤맸지만 프로그램에서 자주 보던 곳을 찾을 수 있었고 그 근처 카페에서 아침을 먹으려고 했는데 문을 연 곳이 한 군데밖에 없어서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겨우 들어간 카페였는데 안타깝게도 아침으로 먹을 만한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당황스러워서 물어보니 토스트가 있다고 해서 시켰지만 내가 생각했던 토스트가 아니어서 배를 채우기엔 부족했다.


여기서 좀 쉬다가 프로그램에 나왔던 알베르게 구경을 가려고 출발하려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비가 그치길 기다려볼까 했지만 금방 그칠 것 같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는데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그 알베르게로 가려면 순례길 방향과는 거리가 더 멀어지는 거라서 그런 걸 감수하면서 까지 구경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다가도 한편으로는 구경을 안 하고 가면 아쉬울 것 같아서 고민했지만 결국 나는 안 가기로 했다.

다른 동행은 그래도 구경을 가겠다고 해서 헤어졌고 그 이후로는 혼자 걸었다.


혼자 걷고 있는데 비가 너무 퍼부었고 길 위에 순례자는 나 혼자밖에 없었다.

하필 걷는 길도 마을이 보이는 도로도 아닌, 차들만 다니고 있는 고속도로 같은 길 옆을 걸어가야 해서 좀 위험했는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쏟아지고 있고 혼자 걷고 있으니 무서웠다. 그래서 동행들이 뒤따라 오고 있나 몇 번을 확인했고 동행이 보이기 시작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걸을 수 있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비가 그치며 점차 하늘이 개이기 시작했다. 얼마나 기쁘던지, 구름이 걷히고 보이는 파란 하늘이 좋아서 그 이후로는 걸으면서 자꾸만 하늘을 보게 됐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다음 마을이 나왔고 열려있는 식당으로 가서 동행과 만나 점심을 먹었다.

아침도 제대로 못 먹어서 배가 고팠고 순례자 메뉴로 주문해서 샐러드, 돼지고기, 요거트를 먹었는데 기억에 남을 만큼 맛있지는 않았어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점심을 먹고 있으니 다른 동행들도 도착하기 시작했고 다 같이 쉬다가 같이 출발했다.

그러나 그친 줄 알았던 비가 또 내리기 시작했지만 아까처럼 많이 오지는 않아서, 그리고 동행들과 함께 걸으니 그나마 괜찮았다.


오늘의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며칠간 헤어졌었던, 동행 한 명이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만에 보는 건지, 며칠 전 헤어지고 언제 볼 수 있을까 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오늘 이렇게 다시 만나니 너무 반갑고 좋았고 내일부터 산티아고 도착까지 함께 하기로 했다.

잠깐 이야기를 나눈 후 씻으러 갔는데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옆에 누군가 씻고 있어서 따뜻한 물이 나오냐고 물었는데 안 나온다고 했고 그분이 먼저 다 씻고 나가는 상태여서 숙소 주인한테 말 좀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주인분이 오셨는데 내가 추울까 봐 큰 수건을 주시면서 앞에 사람들이 씻느라 따뜻한 물을 많이 써서 그런 것 같다고 이 수건으로 몸을 감싸고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지만, 계속 기다리자니 언제 따뜻한 물이 나올지 알 수 없었고 그리고 너무 추웠기에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서 찬물로 샤워할 수밖에 없었다.

비가 와서 추워서 따뜻한 물로 씻고 싶었는데 찬물로 씻고 나니 더 춥게 느껴졌고 휴게실에 난로가 있길래 얼른 가서 몸을 녹였다. 난로 앞에서 몸을 녹이며 일기를 쓰고 있는데 또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마을로 들어올 때, 여기 마을도 이뻐 보여서 구경 가고 싶었는데 비가 와서 밖에 나갈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휴게실에서 계속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어느 순간 비가 그쳤고 그때 얼른 근처 슈퍼에 가서 필요한 거 사러 가면서 잠시 마을구경을 했다. 더 구경하고 싶었는데, 비가 오지는 않았지만 입김이 나올 정도로 너무 추워서 계속 밖에 있을 수가 없어서 다시 숙소로 돌아가야 했다. 너무 아쉬웠다.

그렇게 숙소에서 잠시 쉬다가 숙소 근처에 있는 빠에야 맛집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맛집 소문답게 맛있었고 같이 주문한 샹그리아도 맛있었다.


분명 저녁도 맛있게 먹고 분위기 좋았는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갑자기 내 기분이 가라앉았다.

동행들이 장난을 쳐도, 웃고 있어도 나는 전혀 즐겁지가 않았는데 왜 인지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더 마음이 좋지 않았다. 계속 기분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러면 안 되지, 왜 이러지?' 생각이 들면서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정말 알 수 없는 내 마음이었다.


오늘은 비가 왔다가 맑았다가 퍼부었다가 그쳤다가,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뀐 날씨처럼 내 마음도 몇 번씩 왔다 갔다 했고 이유 모를 기분 변화도 있었다.

이런 감정 변화에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이 길 위에서는 온전히 지금, 현재에 집중하게 되고 내 마음을 조금 더 들여다보게 되는데 그러면서 느끼게 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내일은 날씨가 어떨지, 내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는 없지만 내일도 오늘처럼 무사히 잘 걸을 수 있기를, 비가 오지 않기를, 감정 변화가 생겨도 당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라며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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