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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28일 차 :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될 하루

20km, 6시간 걷기

by 베라노드림

오늘은 30km 정도 걸어가기로 해서 조금 일찍 일어나 준비 후 동행이 챙겨준 아침을 먹고 7시쯤 길을 나섰다.

출발할 때는 비가 오지 않았는데 걷고 있으니 비가 오기 시작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바람은 불지 않아서 그나마 걷기 괜찮았다.

처음에는 평지를 걸어서 출발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걷다 보니 오르막 길이 나왔다. 길바닥은 온통 떨어진 나뭇잎으로 가득했는데 비가 와서 미끄러웠고 그래서 조심스럽게, 긴장하며 올라가다 보니 더 힘들었다.


힘들게 오르막 길을 올라가니 마을이 나타났지만 쉬지 않기로 하고 지나쳤다. 힘들어서 쉬고 싶긴 했지만 지금 쉬기에는 너무 짧게 걷고 쉬는 거라, 여기서 쉬었다 가면 나중에 더 빨리 지치고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을이 보이기 전까지 올라가던 길은 나무가 우거져 있는 길이었는데 마을이 보이기 시작한 이후 걷는 길은 나무 하나 보이지 않는, 오르막이었다.

비가 오는 듯 안 오는 듯 내리고 있었지만 올라갈수록 바람은 강하게 불었고 그 바람을 막아줄 어떤 것도 없어서, 오로지 바람을 다 맞으며 걸어가야 했는데 바람 때문에 걷는 게, 앞으로 나아가는 게 쉽지 않았다.

날씨는 흐렸지만 걸어가는 그 길의 풍경은 너무 이뻤는데, 파란 하늘이 보이고 햇살이 비추고 있는 날씨였다면 더 이뻤겠다고 생각하니 약간 아쉽기도 했다.


힘들게 걸어서 드디어 다음 마을에 도착했다. 높은 곳에 위치한 마을이어서 그런 건지, 오늘 날씨 때문인지

이 마을은 온통 안개로 가득했는데 마치 꿈속에 있는 것처럼, 어느 동화 속 한 장면처럼 몽환적인 분위기여서 신기했고 왠지 모르게 약간 설레기도 했다.

이곳에 오면 갈라시아 지방 음식인 갈라시아 수프를 먹어봐야 된다고 해서, 너무 춥기도 해서 얼른 주문했다. 우리나라 시래깃국이랑 비슷했는데 하얀 쌀밥이 생각나는 맛이었고 몸을 녹이는데 충분했다.


몸을 녹이며 맛있게 먹고 있는데 동행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늘 30km까지 못 걸을 것 같다고, 걷기 너무 힘들다고 했다. 중간에 길을 잃어서 고생했던 동행들이 있었는데 그 동행이 특히 더 힘들어했다. 그래서 20km까지만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오늘 날씨가 좋지 않고 오르막 길이 많아서 나도 힘들긴 했지만 20km만 걷는 건 너무 짧게 느껴져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이 많아졌다. 사실 힘들어하는 동행들은 20km까지만 가고 나를 포함해서 조금 더 걷고 싶은 동행들은 원래 가기로 했던 30km를 가면 되는데,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지만 산티아고 도착까지 며칠 안 남은 시점에서 동행들과 같이 걷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에 고민했었고 고민 끝에 중간에 함께 멈추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일단은 20km 지점 마을에는 숙소가 하나밖에 없고 침대 수가 적었기 때문에 자리가 있는지가 중요해서 전화를 걸어 확인했는데 다행히 자리가 있다고 해서 모두 함께 20km까지만 가는 걸로 계획을 변경했다.


갈라시아수프로 몸을 녹이고 허기를 채운 후 다시 출발했다.

여기서 9km 정도만 가면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하는 거라 여유롭게 걸었는데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오르막길이 나왔고 바람이 너무 거세게 불었고 비도 그쳤다가 오기를 반복했다.

도착까지 20분쯤 남았다는 지도를 보고 기분 좋게 걸어가고 있는데 길이 이상한 거 같아서 다시 지도를 확인해 보니 분명 어느 정도 걸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20분이 남았다고 했다. 마치 미로 속에서 갇힌 느낌이었고 너무 당황스러웠다. 지도가 알려준 길과 실제로 걸어가고 있는 길이 다른 거 같아 혼란스러웠고 그래서 지도를 다시 자세히 보니 다른 길로 안내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먼저 도착한 동행에게 전화를 해서 물어보니 내가 원래 가려고 했던 길이 맞다고 했다. 그래서 가고 있던 길 따라 걸어갔다.

숙소가 보이기 직전, 마지막에 오르막 길이 있었는데 이 오르막 길은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걸은 것 중 제일 힘들게 느껴질 정도로 경사가 너무 가팔랐다. 겨우 힘들게 오르막 길을 올라가니 숙소가 보였는데 그 순간 얼마나 기쁘던지, 드디어 도착했다는 생각에 감격스러웠다.


오늘은 얼마 걷지 않아 일찍 도착했지만 비바람 때문에 밖에 나가지도 못하는 상황이라 꼼짝없이 숙소에 있어야 했는데 숙소가 너무 추워서 도저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알베르게 사장님이 같이 운영 중인, 바로 옆에 있는 카페로 동행들과 다 같이 가서 따뜻한 거 마시면서 벽난로 앞에서 몸을 녹이고 각자 할 일을 하다가 저녁도 여기서 해결했다.


오후쯤 되니 직원 한 분이 더 오셨고 저녁에는 모든 동네주민들이 여기로 다 모인 건지, 비가 오고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씨에도 카페엔 손님들로 바글바글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한국 시골 마을 풍경과 비슷했고 이곳이 동네 아지트 같은 느낌으로 정겨워 보였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도 너무 추워서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한쪽 구석에, 난로 앞에 앉아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빨래를 맡겼었는데 다 됐다고, 가져가라는 얘기가 없어서 기다리다가 저녁을 먹고 빨래 상태를 물었는데 아직 덜 말랐다고 1시간 정도 기다리라고 하셨다. 분명 건조기가 있다고 해서 빨래를 맡긴 건데 시간이 지났음에도 빨래가 아직 안 말랐다고 해서 당황스러웠지만 기다려 보기로 했다. 1시간 뒤에 다시 물었는데 여전히 빨래는 마르지 않았다고 했다. 왠지 건조기가 없는 거 같았는데 이 날씨에 빨래가 마를까 걱정스러웠다. 그렇다고 언제 빨래가 마를지 모르는데 마냥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아서 일단 알베르게로 돌아갔다.


오늘은 날씨가 좋지 않았고 오르막 길이 많아서 그랬는지 짧게 걸었는데도 힘들어서 중간에 멈추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알베르게는 너무 추웠고 빨래는 제대로 안 됐고 저녁이 되니 비바람은 더 몰아쳤고 일찍 도착했음에도 날씨가 좋지 않아 동네 구경은 하지도 못하고 숙소나 카페에서만 갇혀 있어야 해서, 여러모로 힘들고 참 속상했던 하루였는데 사장님과 직원과 계속 같은 공간에 있다 보니 처음에는 무서워 보이고 차갑게 느껴졌던 직원이었지만 첫인상과는 다르게 다정하고 유쾌하신 분이라는 걸 알게 됐고 사장님은 첫인상 그대로 따뜻하고 푸근한 분이셔서, 하루였지만 두 분과 정이 들었다.

그래서 힘들었고 쉽지 않았다는 하루로만 기억될 뻔한 오늘이 두 분 덕분에, 힘들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던 하루로, 조금은 따뜻했던 기억으로 남을 수 있게 되었고 순례길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날 중 하나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하루가 됐다.

내일도 비가 온다고 해서 너무 걱정되는데 제발 비바람이 심하지 않기를 바라며, 밤이 되니 더 추워져서 잠들 수 있을까 걱정하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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