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km, 3시간 40분 걷기
과연 오늘 걸어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새벽부터 바람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오늘은 가장 짧게, 12km 정도만 걷기로 결정했다는 건데 원래는 22km 정도를 가려고 했었지만 그 마을에 알베르게가 몇 개 없는데 리뷰가 다 좋지 않아서 알베르게도 많고 리뷰도 괜찮은 곳이 많은, 여기서부터 12km 떨어져 있는 마을에 머무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짧게 걷기로 했기에 평소보다는 조금 늦게 일어나 준비를 했다.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강한 비바람으로 날씨가 너무 좋지 않아서 이런 날씨에도 걷는 게 맞는 건지, 위험하지 않을지 다들 걱정하고 있었다.
내가 느지막이 준비하는 동안 동행들은 먼저 아침을 먹고 있었는데 오늘은 아무래도 걷는 게 위험할 것 같다고, 택시를 타고 다음 마을까지 가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다.
나는 처음에는 택시를 타고 간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는데 더 기다려도 날씨가 좋아질 것 같지 않아서, 안전을 위해서는 택시를 타고 가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숙소 사장님께 여쭤봤다. 사장님이 택시기사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고 나중에서야 통화가 됐는데 우리가 가려던 곳까지 택시로 갈 수 있다고 말해주셨다. 그러나 다른 순례자들 중에는 택시를 타고 가는 사람이 없었고 다들 이 날씨에도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다행히 아까보다는 비바람이 조금 잦아든 상태여서 동행들의 마음이 바뀐 건지 택시를 타지 않기로, 걸어가기로 결정했다.
알베르게에서 우리가 맨 마지막에 나왔는데 하필, 우리가 걸어가려고 하니 또다시 비바람이 몰아쳤다.
내 얼굴을 타고 흐르는 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정도로 비바람이 강하게 불었고 이렇게 걷고 있으니 너무 서럽고 슬퍼졌는데 난 왜, 뭘 위해서 이런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걷고 있는 건지 싶었다.
바람이 너무 심해서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고 강한 비바람에 눈을 뜨기도 힘들었으며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기에, 아니 멈출만한 곳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계속 걸어야 했다.
걸은 지 얼마나 됐을까, 바람은 여전히 거세게 불었지만 다행히 비는 그쳤는데 길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계속되는 비로 물이 넘쳐 길이 없어진 곳이 많아 위험하다 보니 긴장하며 조심스럽게, 천천히 걸어가야 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카페가 보여서 쉬었다가기로 했다. 계속 바람을 맞고 오느라 너무 추워서 따뜻한 차 한잔 마시며 몸을 녹이고 다시 출발했는데 비가 내리지 않아 좋았지만 바람이 어찌나 심하게 불던지, 바람을 막아 줄 나무 하나 없어서 바람이 더 세게 느껴졌고 뒤에서 부는 강한 바람으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앞으로 밀리게 돼서 위험하기도 했다. 너무 심할 때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출발하고 또다시 멈췄다가 출발하고 이렇게 반복하며 걸었는데 이런 날씨에도 풍경은 너무 이뻤다.
그런데 갑자기 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비바람 속에서 걷고 있었는데 마을에 다 와갈 때쯤 놀랍게도 비가 그치면서 하얀 구름과 파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그 모습이 어찌나 이쁘던지 계속 사진을 찍어댔고 기분 좋게 걸어가다 보니 오늘의 알베르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설과 전체적인 분위기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이 숙소에 머물 수 있음에 감사했다.
방 배정받고 짐 정리하고 씻은 후 점심을 먹으러 갔다.
점심은 순례자 메뉴로, 그동안 먹어보지 못했던 메뉴들로 골랐고 맛있게 먹었다.
시간 여유가 많아서 마을 구경을 하고 싶었는데, 씻고 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었고 점심을 다 먹을 동안에도 그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바로 숙소로 가야 했다. 너무 아쉬웠다.
숙소로 돌아가 빨래하고 난로 앞에서 몸을 녹이며 쉬다가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분명 나갈 때만 해도 비가 오지 않았는데 숙소에 가려고 밖에 나오니 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늘 하루 종일 비가 오고 그치고 오고 그치고를 반복했던 것 같다.
오늘 같이 이런 최악의 날씨 상황에서도 걷는 걸 포기하지 않았지만 출발하자마자 강한 비바람에 정신을 못 차렸고 이게 맞는 건지, 걷는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뭔지,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뭘 위해서 걷고 있는 건지 등등 생각이 많아지면서 그와 동시에 서러움도 폭발했었다. 그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자연스레 몸과 마음이 이끄는 대로 걷다 보니 그런 감정도 느꼈던 것 같은데 어쨌든 무사히 도착했음에 감사했고 언제 이런 경험을 해보겠냐며, 아마 살면서 평생 겪어보지 못할 경험이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힘들었지만 잊을 수 없는, 의미 있었던 기억으로, 순례길 하면 떠오르는 기억 중 하나로 남을 것 같다.
오늘은 여태껏 걸은 것 중 가장 짧게 걸어서 그만큼 시간적 여유가 많았는데도 비 때문에 또 아무것도 못하고 숙소에만 갇혀 있어서, 남은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낸 것 같아서 너무 아쉬웠다. 계속 비가 와서 날씨가 좋지 않으니 다음에는 제발 날씨 좋을 때 와서 마을에 도착하면 제대로 구경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는데 지금 이 길을 걷고 있는 중인데도 벌써 다음을 생각하고 있는 내가 놀랍고 신기했다.
그리고 과연 다음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조금 심란해졌다.
이제 이 비가 너무 지긋지긋한데, 도착까지 며칠 안 남았으니 우의도 그만 입고 파란 하늘을 보며 걸을 수 있는 날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