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km, 10시간 걷기
오늘은 조금 일찍 길을 나섰다.
오랜만에 30km를 걸어야 해서, 해가 뜨기 전에 출발해야 해서, 살짝 긴장했었는데 어두운 길을 걷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아마도 해가 뜨지 않는 혹은 해가 뜰 무렵에 출발해서 걷는 날이 오늘이 마지막이지 않을까 생각했고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아쉽고 슬퍼졌다.
어두웠지만 몇 명 동행들이 핸드폰 불빛으로 비춰줘서 어둡지 않게, 위험하지 않게 걸어갈 수 있었다.
오늘은 가는 길에 꼭 가고 싶은 카페가 있었다.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부터 저장해 둔 곳으로 카페 분위기가 좋고 맛있다고 해서 꼭 가고 싶었던 곳인데 카페가 출발하고 4km도 안 되는 지점에 있는 거라, 걸은 지 얼마 안 돼서 쉬어가야 해서 동행들이 원하지 않으면 혼자라도 가려고 했다. 그런데 다들 가겠다고 해서, 같이 갈 수 있게 되어 내심 기분이 좋았고 출발한 지 1시간이 안 돼서 카페에 도착했다.
기대했던 대로 카페는 외관부터 너무 이뻤고 분위기도 좋아 보였는데 우리가 첫 손님이어서 왠지 더 설렜다.
진열대에 디저트가 놓여 있었지만 종류가 몇 개 없어 보였는데 나중에서야 알게 됐지만 메뉴판이 따로 있었고 아침으로 먹을만한 것들이 꽤 많았다.
나는 진열대에 있는 것들 중에서 또르띠야랑 브라우니 중에 고민하다가 브라우니를 시켰고 초코라테를 주문했다. 여기서도 우유에 코코아 가루를 타먹는 초코라테가 아닌, 며칠 전 마셨던 사장님께서 직접 만들어 주셨던 초코라테와 비슷해서 괜히 반가웠고 더 맛있게 느껴졌다.
또르띠야도 기존에 보던 거랑 다르게 더 두툼해서 맛있어 보였고 다른 동행이 시킨 토스트도 맛있어 보였는데 토스트 하나에도 얼마나 정성 들여 만드시던지, 사장님이 만드시는 모든 것들에 정성과 진심이 느껴져서 더 좋았다.
다들 여기서 맛있게 먹고 기분이 좋아 보여서 나도 마음이 편했고 기대했던 곳이었는데 기대만큼 너무 좋았어서 행복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걷다 보니 문어요리가 유명하다는 도시에 도착했고 먹어보기로 했다.
원래 문어를 좋아하지는 않는데 유명하다고 하니까, 후기에 다들 맛있었다고 하니까 궁금했는데 한국에서 먹던 문어랑은 달랐다. 문어가 질기지 않고 엄청 부드러웠고 씹는 식감이 좋아서,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아서 맛있게 먹었다.
문어와 함께 레몬 맥주도 마셨는데 이 길을 걸으면서 레몬 맥주의 맛을 알게 됐고 최근 들어 계속 마시고 있다. 한국에서는 맥주를 거의 마시지 않는데 우연히 마셔본 레몬 맥주에 반했고 한국 가면 너무 생각나고 그리울 것 같아서, 아쉬움을 덜 느끼려고 마실 수 있을 때 마시자는 생각에 하루에 한잔씩은 마시려고 하고 있다. 힘들게 걷다가 잠시 멈춰서 마시는, 아니면 하루를 마무리하며 저녁에 마시는 레몬 맥주의 맛은 이 길을 떠올릴 때마다 생각 날 것 같다.
문어를 다 먹고 나서 근처에 젤라토 가게가 있어서 디저트로 젤라토도 먹었는데 배가 부른 상태였지만 그래도 너무 맛있었다.
오늘도, 어제 같이 걸었던 동행과 또 몇 시간을 같이 걸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얼마나 웃었던지, 걷는 내내 웃음이 끊이질 않았고 오늘도 덕분에 힘들지 않게 걸을 수 있어서, 같이 걸을 수 있어서 감사했다.
그렇게 2~3시간을 걸었는데도 쉴만한 카페가 나오지 않았다. 보통 이쯤 되면 카페가 보이는데, 분명 구글 지도에는 영업 중이라고 안내되어 있어서 가보면 문이 닫혀 있는 카페가 많았고 그러다 보니 더 힘들게 느껴졌다.
그래도 다행히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하기 1시간 전쯤, 드디어 카페가 나왔다. 목적지까지 얼마 안 남은 상황이어서 힘들어도 참고 갈까 했지만 아무래도 안될 것 같아 쉬었다가기로 했다. 다들 힘들어서였는지 말없이 멍하게 앉아만 있었는데 동행 중 한 명이 말도 걸고 이야기를 이어가며 분위기를 띄워줘서, 덕분에 웃을 수 있었고 분위기도 살아났다.
어느 정도 쉬다가 오늘의 마을을 향해 힘내서 다시 걸었다.
쉬고 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었고 마지막 목적지까지는 오르막이라 더 힘들게, 겨우 도착했다.
가정집 같은 알베르게여서 신기하고 좋았지만 단점이라면 방이 너무 추웠는데 비가 내리고 있어서 더 춥게 느껴졌던 것 같다.
침대 배정받고 짐 정리하고 씻고 나서 빨래방에 가려고 나왔는데 비가 더 많이 내리고 있었다. 비가 너무 와서 다시 숙소로 갔다가 저녁 먹으러 나가기에는 힘들 것 같아서 나간 김에 저녁도 먹으려고 했는데 립 맛집이라는 곳은 너무 늦게 오픈을 해서,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아서 근처 아무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난 분명 스테이크를 시켰는데 내가 시킨 거랑은 다른 음식이 나와서 직원한테 말했지만 직원의 태도는 너무 당당했다. 몇 번을 다시 말해도 그 태도는 똑같았고 더 이상 말을 해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잘 못 나온 대로 먹으려고 하고 있는데 그때 동행 중 한 명이 본인이 잘못 나온 내 음식을 대신 먹겠다고, 자신의 음식을 내게 건네주며 바꿔주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너무너무 미안해서 괜찮다며 이대로 먹겠다고 했다.
동행의 이런 행동에 너무 놀랬는데 그 동행도 본인이 먹고 싶은 음식을 시켰을 텐데 망설임 없이 바꿔준다고 하다니, 내가 이런 상황에서 동행의 입장이었다면 나는 과연 저렇게 할 수 있었을까 생각이 들면서 동행의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고 미안했는데 내 음식이 잘못 나왔다고 다른 동행들도 자신들의 음식을 나에게 나눠줬다. 이런 모습에, 동행들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받았고 덕분에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오늘은 비가 온다는 예보와는 다르게, 출발할 때는 비가 내리지는 않고 계속 흐렸었는데 도착할 때쯤 결국 비가 내렸다. 그래서 마지막에 조금 힘들게 걸어왔지만 그래도 걷는 내내 내리지는 않아서 그나마 괜찮았다.
오늘도 동행들 덕분에 웃으면서, 힘들지 않게 걸을 수 있었고 동행들의 배려에 마음이 따뜻해짐과 동시에 나를 되돌아보게 되는 시간이었는데 '과연 나는 동행들에게 배려를 하고 있을까, 나는 동행들에게서 도움을 많이 받고 있는데 나는 동행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 있을까' 등등 생각이 많아지며 반성하게 됐다.
나이와는 상관없이, 배울 점이 많은 사람들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오늘 한번 더 확실히 깨닫게 되었고 그들을 보며 '지금보다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다.
이제 내일이면 드디어 이 길을 걸으며 마지막으로 알베르게에 머물게 되는 날이고 산티아고 도착까지 단 이틀 남겨두고 있다. 언제 여기까지 걸어왔을까, 드디어 왔구나 싶다가도 이틀밖에 안 남았다고 하니 너무 아쉬운 마음이 들고 벌써 그리워지고 있는데 여기까지 아프지 않고, 걱정했던 무릎이 잘 버텨줘서, 너무 다행이고 남은 이틀 동안 아무 일 없이 잘 도착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