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km, 4시간 30분 걷기
오늘은 드디어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날이다.
처음 걸을 때만 해도 이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느 순간 이 길이 끝나는 게 아쉬워서, 최대한 늦게 도착했으면 좋겠다 싶었다가도 도착하기 2~3일을 남겨뒀을 때는 빨리 도착해서 끝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나 오늘이 진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아쉽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하고 여러 감정이 교차했고 어제는 복잡한 감정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평소보다 더 잠을 설쳤다.
이 마을에 있는 카페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출발하려는데 안개가 잔뜩 끼고 비도 조금씩 와서, 제발 산티아고 도착할 때만이라도 비가 안 오길 바라며 걸었지만 산티아고 도착까지 대략 1시간 좀 넘게 남겨두고 우의를 입어야 할 정도로 비가 엄청 쏟아졌다.
오늘이 마지막인데 제발 오늘만큼은 날씨가 좋기를 바랐는데,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빗줄기는 점점 더 굵어졌고 안개로 가득한 날씨 때문에 이 상황이 너무 원망스럽고 슬펐다. 제발 도착할 때쯤에는 비가 멈추기를 빌며 걷다 보니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는지 산티아고 도착까지 얼마 안 남은 시점부터 비가 잦아들기 시작했고 너무 다행이었다.
산티아고 대성당에 다 와갈 때쯤, 순례자들끼리 둥글게 모여서 해냈다고 드디어 도착했다며 축하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됐고 그 모습에 울컥했다. 그러다 최근 자주 마주치던 한국인 순례자를 만났다. 그분은 대성당을 이미 갔다 오는 길이셨는데 너무 홀가분한 모습으로 환하게 웃으면서, 우리 동행들에게 고생했다고 말해주셨고 우리도 그분에게 고생했다며 서로 격려를 했는데 그 순간 또 한 번 울컥했다.
드디어 유튜브에서 보던 대성당에 도착했고 간절히 원했던 내 소원이 하늘에 닿았는지 기적처럼 비가 그쳤다.
내가 드디어 여길 오다니, 이 성당을 실제로 보다니, 믿기지 않아서 한동안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주위를 둘러봤는데 다들 서로 위로하고 축하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기쁘면서도 울컥했던 기분을 뒤로하고 다시 비가 오기 전에 얼른 성당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혼자서도 찍고 동행들과도 사진을 찍으며 지금 이 기분을 즐기고 추억으로 남겼는데 신기하게도 사진을 다 찍고 나니 다시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졌다.
한 가지 아쉬웠던 건, 30여 일 동안 걸어오면서 자주 마주쳤던 외국인 동행자들을 여기서, 아무도 만나지 못해서 이 기쁨을 함께 나누지 못했다는 것이다. 출발할 때부터 꽤 자주 마주치던 몇 명의 순례자들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보이지 않아 그들의 안부가 궁금했었지만 결국 끝까지 다시 만나지 못해서 너무 아쉬웠다.
오늘은 알베르게가 아닌, 동행들끼리 머물 집을 빌렸는데 생각대로 좋아서 너무 만족스러웠다. 짐 풀고 씻고 나서 동행들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다가 각자 쉬었고 침대에 누워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는데 너무 포근하게 잘 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순례길을 걷다가 이런 휴식 시간이 주어져도, 낮잠을 자면 밤에 잠을 못 자서 다음 날 컨디션이 안 좋을까 봐 마음 편히 자본적이 없는데 이제 그런 걱정이 없으니 나도 긴장이 풀렸는지 바로 잠에 들었던 것 같다.
오늘 저녁은 한식당을 예약해 뒀다.
드디어 이곳에 도착했으니 저녁으로는 무조건 맛있는 거, 한식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동행 중 한 명의 생일이기도 해서 몰래 서프라이즈 파티를 해주려고 케이크를 사고 어떻게 축하해 줄지 계획도 세웠다.
동행들이 다 한식당에 모였고 두루치기를 먹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매워서 당황스러웠지만 오랜만에 먹는 한식이라 그래도 맛있게 먹었다. 저녁을 다 먹은 후 준비한 케이크로 깜짝 생일파티를 해줬는데 기뻐하는 동행의 모습에 뿌듯했고 그 모습에 나도 행복해졌다.
저녁을 다 먹고 숙소로 와서 동행과 얘기를 나누는데, 그 동행은 30여 일을 이것만 생각하며, 이것 하나만 보고 걸었는데 막상 도착하니 너무 허무하다고 했다. 초반에 걸을 때만 해도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울 것 같다고 말했었는데, 그 동행은 울지 않았고 운 건 오히려 나였다.
그 동행의 허무하다는 말에 약간은 공감은 가면서도 기쁨이나 성취감보다는 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게, 그런 마음이 먼저 느껴졌다는 게 왠지 모르게 안타깝고 슬펐다.
내가 이 길에 도착하면 어떤 기분일까 걷는 동안 수없이 상상하며 궁금했었는데 결론은, 해냈다는 성취감이 가장 컸고 한편으로는 끝이라고 생각하니 아쉽고 슬프기도 했다. 그리고 나 자신이 참 대견하게 느껴졌다.
이 길을 떠나기로 결심했던 이유가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던 마음이 제일 컸지만 내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는데 이 길을 걷는 도중에, 그리고 무사히 도착하고 나니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고 자신감이 거의 없던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정리하고 싶었던 생각 일부는 정리를 했고 일부는 여전히 정리하지 못했지만 한국에서의 복잡했던 생각들은 접어 두고 '오늘은 뭘 먹지, 어디서 자야 되지, 어디까지 걸어 갈지' 등 이런 생각들만 하고 '오늘 걷는 길도 참 이쁘네, 오늘 햇살이 따뜻하네' 등 온전히 현재에, 지금 보이고 느껴지는 것들에 대해서만 집중하거나 아니면 머릿속을 텅 비우고 아무 생각 없이 걷기만 해서 오히려 더 좋았다.
언제 이렇게 현재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 볼 수 있을지, 머릿속을 비우고 지낼 수 있을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불가능한 일이겠다고 생각하니 이 길을 걸은 30여 일의 시간이 참 소중하게 느껴졌다.
누군가가 말했다.
이 길에 도착하면, 이 길의 끝에서 기적을 경험하게 될 거라고.
처음에는 이 말을 듣고, 아니 이 말이 아니었더라도 이 길을 떠나기로 준비하면서부터 도착하면 분명 무언가 달라지는 게 있을 거라고, 큰 변화가 있을 거라고, 그 기적이 뭘까 생각하며 설레며 여기까지 왔는데 이 길의 끝에 가까워질수록 그런 기적은 없을 거라는 걸 깨달았고 도착하고 나니 예상대로 큰 변화는 없었지만 내 기적은 동행들을 만난 게 아닌가 싶다.
서로 알지도 못했던 우리가, 단지 걷기 위해 모인 여기에서 처음 만나 30여 일을 함께 했다는 게 믿기지 않고 다들 좋은 사람들이라 함께 할 수 있었음에 너무 감사했으며 그들을 통해서 나 자신을 돌아보며 많이 배웠다.
이 길을 걸으면서 나의 원래 모습을 거의 다 드러낼 정도로, 원래 성격 상 친해지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나를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동행들에게 나의 모습을 평소보다는 빨리, 많이 보여준 것 같아서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들이 없었다면, 과연 내가 끝까지 걸을 수 있었을까 싶고 끝까지 갔더라도 너무 외롭고 힘들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드디어 이곳에 도착했지만 사실 아직 나는 끝난 게 아니다.
여기서 내일까지 휴식을 취한 뒤, 세상의 끝을 향해 4~5일 더 걸을 예정이다.
이것 또한 한국에서부터 준비하면서 계획했던 일인데 나 자신을 믿지 못해서 준비할 때만 해도 내 컨디션을 보고, 그때 상황 보고 결정하자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상태로라면 충분히 더 걸을 수 있어서 예정대로 더 걸어가기로 했다.
그 길 끝에는 기적이 있을까, 아직 정리 못한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을까 싶지만 그런 마음보다는 다시 이 길을 걸으며 조용히 잘 마무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