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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37일 차 : 세상의 끝으로, 다시 시작되는 길

21.1km, 6시간 걷기

by 베라노드림

짧은 휴식을 끝내고 오늘은 조금만 걷기로 해서, 느지막이 일어나 준비했다.

산티아고가 끝이 아닌 세상의 끝이라고 불리는 피스테라와 묵시아를 향해 같이 걷기로 한 동행을 제외한 나머지 동행들과는 여기서 헤어져야 했기에, 평소처럼 아무 일 없는 듯이 준비를 하고 행동하려 했지만 마음은 평소와 같지는 않았다.

우리가 먼저 출발을 해야 되는 상황이었는데 괜히 마지막이라고 인사하고 얘기 나누고 하다 보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일부러 재빨리 도망치듯 나왔는데도 눈물이 났다.

그러나 감정을 추스를 틈도 없이, 출발하려고 하니 비가 내리고 있어서 급히 우의를 입고 길을 나섰다.


다행히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산티아고 대성당을 향해 걷던 중 비가 그쳤다. 역시나 날씨가 좋으니 대성당이 더 웅장해 보이고 멋있어 보였고 이틀 전과는 분위기나 그걸 바라보고 있는 내 기분도 달랐는데 지금은 맑은 날씨만으로도 기분이 좋았고 뿌듯한 마음이 컸다.

혹시나 그동안 걸어오면서 자주 보이던 순례자가 오늘 이곳에 도착하지 않았을까 싶어 대성당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이렇게 끝인 줄도 몰랐던, 마지막 만남을 떠올리며 발길을 돌려야 했다.

피스테라로 향하는 길은 순례자들을 거의 볼 수 없었고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과는 풍경이나 분위기가 달랐다. 오랜만에 보는 파란 하늘과 춥지도 덥지도 않은 적당한 날씨 덕분에 힘들지 않고 기분 좋게 걸을 수 있었다.


오늘 머물 알베르게는 깨끗해 보였고 관리가 잘 되어 있는 느낌이었으며 무엇보다 전부 단층침대라서 좋았지만 주방이 너무 좁았고 조리기구들도 별로 없어서 이 점은 좀 아쉽기는 했다.

오늘은 늦게 출발했더니 짐 정리하고 씻고 나니 저녁시간이어서 마을 구경을 할 생각은 못하고 바로 저녁을 먹었다. 숙소에서 식당까지는 거리가 있는 편이라 가지고 있던 라면을 끓여 먹기로 했고 햇반도 있어서 같이 먹고 있는데 아침에 헤어졌던 동행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동행 중 한 명은 다른 곳으로 떠났고 몇 명 동행들은 함께 여행을 떠났는데 연락을 하니 너무 좋으면서도 같이 이 길을 걸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었고 함께 하지 못해서 아쉬운 마음도 컸다.


오늘은 산티아고에서 끝이 아니라 0km를 향해, 세상의 끝이라고 불리는 피스테라와 묵시아를 향해 걸은 첫날임과 동시에 동행들과도 완전히 헤어지는 날이었다.

다시 걷게 된 첫날부터 날씨가 너무 좋아서, 풍경이 너무 이뻐서, 그리고 풍경이나 분위기가 지금까지 걸어왔던 모습이랑은 달라서 이 길을 걷지 않았으면

보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니 걷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계속 걸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시끌벅적하게 동행들과 같이 걷다가 다른 순례자들도 보이지 않고 길 위에 둘만 걷고 있으니 처음에는 어색하기도 하고 너무 조용해서 이상했는데 걷다 보니 나름대로 그 고요함도 좋았다.

밤이 되니 바람도 불고 비가 내리는 시작 했다. 내일은 34km 정도를, 긴 거리를 걸어야 해서 벌써 걱정이 되는데 제발 내일 아침에는 비가 그치고 오늘처럼 맑은 날씨 속에서 걸을 수 있기를 바라며 평소보다 일찍 하루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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