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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38일 차 : 여기서 멈출까? 더 이상은 못 가

34.1km, 9시간 30분 걷기

by 베라노드림

어제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비바람 소리에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날씨가 너무 안 좋은 거 같아서 오늘 제대로 걸을 수 있을지 너무 걱정스러웠지만, 멀리 가야 해서 조금 일찍 길을 나섰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깜깜했고 비까지 쏟아져 조금 무서웠는데 출발한 지 5분도 안 돼서 불빛 하나 없는 숲 속 길을 걸어가야 했고 퍼붓는 비 때문에 더 무서웠다.

신발은 이미 다 젖었고 오늘따라 가방도 너무 무겁게 느껴지고, 출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너무 힘들었다.

숲 속을 얼마동안 걸었을까, 드디어 차가 보이는 도로가 나왔고 그 옆을 걷게 됐는데 비는 계속 오지만 불빛이라도 있으니 그나마 덜 무서웠다.


그렇게 겨우 10km 지점을 통과하게 됐고 카페가 보였다. 배는 안 고팠지만 여기서 쉬지 않으면 다음에 언제 쉴 수 있을지 몰라서 일단 쉬어 가기로 했다. 2시간 넘게 빗속을 걸어오다 보니 이미 너무 지친 상태여서 카페에서 간단히 먹고 쉬다가 다시 출발하려는데, 아직도 비가 억수같이 내리고 바람도 많이 불고 있어서 나가기가 너무 두려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걸어야 했다.

강한 비바람 때문에 비가 하늘에서 내리지 않고 옆으로 퍼붓어 얼굴을 때리는 것처럼 느껴져서 너무 아팠고 너무 힘드니까 동행과 얘기를 나눌 힘도 없어서 그저 걷기만 했다.

이런 날씨 속에서 걷다 보니 이렇게 걸어가는 게 맞는 건지, 이건 정말 아니다 싶었고 오늘 34km를 갈 수 있는 건지 계속 그 생각만 했다.


일단 다음 카페가 나오면 거기서 쉬면서 생각 좀 하려고 했는데 카페는 보이지 않았고 순례자도 거의 없었다. 길 위에 오직 나와 동행만 있었고 비는 억수같이 퍼붓고 바람도 심하게 불었는데 이런 길을 또 2~3시간을 걸어가다 보니 다행히 카페가 나왔다.

카페에서 쉬면서 동행과 얘기를 해보는데, 동행은 그래도 끝까지 가는 게 맞는 것 같다고 했다.

만약 오늘 멈추게 되면 내일 어차피 또 34km 정도를 걸어야 되는 상황인데 내일 날씨가 어떤지 알 수 없고 오늘 여기까지 왔으니 끝까지 가겠다고 했다.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렇게 걷는 건 진짜 아닌 것 같은데 너무 힘들어서, 이 길을 걷는 동안 처음으로

여기서 멈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동행의 말대로 오늘 멈추면 내일 또 많이 걸어가야 되고 오늘 날씨가 지금까지 중 가장 역대급인데 내일 날씨가 오늘보다 더 안 좋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중요한 건 멈추고 싶어도 숙소가 없었다. 비수기라 문을 연 알베르게가 거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예정대로 34km를 걸어가야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조금 쉬었더니 아까보다는 가방의 무게도 덜 힘들게 느껴졌고 조금은 괜찮아져서 여기서부터는 동행과 그래도 얘기를 나누며 걸을 수 있을 정도였다.


걷다 보니 경사가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가야 했는데 올라갈수록 얼굴이 아플 정도로 비바람이 너무 심했다.

초반에 걸을 때만 해도 계속 내리는 비로 물이 범람해 길이 사라진 구간이 있긴 했어도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처럼 길이라고 인식되는 부분이 있어서 물을 피해 걸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도착 마을에 가까워질수록 물이 범람한 수준이 심각해서 길이 없어진 구간이 많았는데, 특히 길 바로 밑을 흐르던 물이 범람해 길과 구분이 되지 않아서 방심하면 불어난 물에 휩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너무 무서워 정신 바짝 차리고 걸었다.

신발은 이미 젖었고 그리고 피할 곳도 없어서, 물이 많이 찬 데는 종아리를 넘길 정도로 차오르는 수준이라 그 길을 지나갈 때는 물속을 그대로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길을 걸으면서 지금 뭘 위해서 이렇게까지 걷고 있는 건지 많은 생각이 들었고 그리고 무서웠는데 마지막에 힘들게 그 구간을 벗어나 뒤돌아보니 물이 불어나는 게 너무 순식간이라서 더 무서웠다.


아까 카페에서 쉰 이후로 더 이상 카페는 보이지 않았고 비가 계속 내려 어디 앉아서 쉬지도 못하고 너무 힘들게 오늘의 마을에 도착했다. 우리가 늦은 오후, 거의 저녁쯤에 도착해서 알베르게도 겨우 잡을 수 있었는데 길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던 순례자들이 다들 여기에 모여 있는 것처럼 꽤 많았다.

이런 날씨 속에서 걸은 나도 참 대단했지만 다른 순례자들도 너무 존경스럽고 대단했다.

저녁은 바로 옆에 있는, 알베르게에서 같이 운영하고 있는 식당에 가서 먹었는데 마침 따뜻한 수프가 나와서 오늘 같은 날씨에 너무 좋았다. 다른 음식들도 다 괜찮아서 맛있게 먹었다.


오늘은 정말, 순례길 하면 생각나는 순간들 중 가장 힘든 날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너무 힘들었다.

보통은 비가 와도 하루 종일 내린 적은 거의 없었고 내리고 그치고를 반복하거나 아니면 비만 오던지, 바람만 부는 날도 있었는데 오늘은 출발한 순간부터 도착할 때까지 비가 계속 내렸고 바람도 심하게 불어서, 하필 이런 날씨에 또 많이 걸어야 해서 여러 모로 가장 힘들었던 날이었다.

‘그냥 산티아고까지만 걸을걸 그랬나, 왜 굳이 이 길을 걷겠다고 힘들게 고생하고 있을까, 이렇게 걷는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걸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도착해서 씻고 저녁을 먹고 있으니 조금 나아졌고 다들 각자의 이유로 이 길을 걷고 있는 모든 순례자들이 존경스럽고 너무 대단하게 느껴졌다.

사실 원래는 산티아고까지는 동행들과 걷고, 그 이후 0km를 향해 걷는 길은 혼자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오늘 이런 상황에서 걷다 보니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게 너무 미안할 정도로, 함께 걷고 있는 동행에게 너무 고마웠다.

그 동행이 없었으면 과연 나는 오늘 어땠을까, 내 상태는 괜찮았을까,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무사했을까 싶었고 내가 포기하지 않게 이끌어줘서 다시 한번 동행의 존재에, 함께 걷게 되어 너무 고마웠다. 너무 힘들었지만 그만큼 기억에 남을, 의미 있는 하루였다.

남은 며칠은, 아마 오늘만큼 힘든 날은 없을 거라 생각하며 내일은 제발 비가 오지 않기를,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빌며 하루를 마무리하였다.


(너무 힘들었던 탓에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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