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km, 5시간 걷기
역시나 어제도 자다 깨다 반복하고 뒤척이다 제대로 잠을 못 잤고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그날이기도 해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어제 유난히 힘들어했던 동행의 모습을 보며 이제부터 같이 출발하는 걸로 의견이 모아졌지만 낮에 안 나가고 밤에 나가게 돼서 제대로 동네 구경을 못해 아쉬웠고 컨디션 저하로 혼자 걷고 싶기도 해서 동행들을 먼저 보내고 느지막이 준비해 8시쯤 길을 나섰다.
이 시간에 출발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늦게 출발하는 순례자들이 많아서 놀랍기도 했지만 혼자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마을을 빠져나올 때 지나치지 못하고 빵집에서 빵을 샀고 먹으면서 걸었는데 빵도 너무 맛있었고 아침에 본 마을은, 어젯밤에 봤던 것보다 훨씬 좋아서 떠나기 아쉬울 정도로 미련이 남아 자꾸 뒤돌아 다시 보고 뒤돌아 다시 보고를 반복하고 나서야 겨우 마을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오늘은 ‘언제 끝이 날까, 어깨가 아프네, 나 왜 여기 있지?’ 등 이런 생각들은 전혀 하지 않았고 오롯이 지금, 걷는 이 순간에 집중했다. 걷다 보니 카페가 보이길래 쉬었다 가려고 들어갔는데 다른 한국분들이 계셨다. 오늘은 혼자 걸으려 했던 날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또 다른 사람들과 같이 걷게 되었지만 계속 같이 걸었던 건 아니고 같이 걷다가 따로 걷다가 또 같이 걷기를 반복했다.
혼자 걷고 싶어서 동행들을 먼저 보내고 늦게 나왔는데 막상 혼자 걷고 있으니 편하긴 하지만 심심하기도 했는데 다른 한국분들과 걷다 보니 동행들이 더 생각났다.
오늘 나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했던 일정은, 중간 마을에 한국인이 운영하시는 카페가 있는데 여기서 파는 또르띠야가 그렇게 맛있다고 해서 맛있는 또르띠야를 먹을 생각에 엄청 기대했었다. 또르띠야는 스페인 전통음식으로 감자가 들어간 오믈렛을 말하는데 그동안 걸어오면서 카페에서 봤었고 순례길 준비하면서도 많이 들어봤던 음식이었는데 첫날 먹어봤지만 맛있다고 느끼지 못했었기에 오늘 기대가 컸다.
사람이 많아 겨우 자리 잡을 수 있었고 한 개 남은 또르띠야를 주문해서 먹게 됐는데...!
너무 기대가 컸던 건지, 첫날 먹던 거랑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며칠 전부터, 아니 한국에서 준비할 때부터 너무 기대했던 곳이었는데... 그러나 사람마다 입맛은 다르니까 내 입 맛에는 안 맞았어도 먼저 먹고 갔던 동행들은 맛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실망한 채로 다시 길을 나섰고 다 와갈 때쯤 되니 발가락이 아파왔지만 다행히 얼마 안 가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동행들이 먼저 숙소에 도착했었고 나는 늦게 도착해서 다른 방을 배정받았는데 도착하자마자 씻고 빨래하려는데 어떤 일로 동행들에게 또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오늘부터 동행들이랑 같이 걷기로 했지만 오늘은 혼자 걷고 싶어 따로 왔는데 혼자가 된 느낌이었다.
이 길은 분명 혼자 걸으려고 왔으니까 혼자가 되는 건 당연한 건데 이게 왜 슬프게 느껴지는 건지, 왜 자꾸 사람들에게 기대고 의지하게 되는 건지, 어제오늘 도대체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건지... 생각이 많아지면서 마음이 안 좋아졌다.
마침 그때쯤 예전에 꽤 오래 같이 여행했던 지인들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지금 내 마음이 안 좋아서 그런지 너무 그립고 더 보고 싶었다. 한참을 그 지인들과 얘기 나누다가 마트 가고 동네 구경 할 겸 혼자 나왔다.
대도시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제 머물렀던 곳보다는 컸는데 동네가 마음에 들어서 천천히 걸으며 구경하고 광장에 앉아서 쉬며 아까 연락 온 지인과 통화도 했다. 통화를 하면서 그동안 어떻게 걸어왔고 지금은 어떤지 이런저런 얘기를 했는데 내 얘기를 잘 들어주고 공감해 줘서 너무 고마웠고 덕분에 내 마음도 한결 편안해졌다.
마트 가서 간단히 먹을 거 사고 이대로 들어가긴 아쉬워서 좀 더 돌아다니며 구경하면서 아까 느꼈던, 좋지 않은 감정을 정리하고 숙소에 들어가서 좀 쉬다가 길에서 혹은 숙소에서 자주 만났고 잘 챙겨 주시던 부부와 동행들과 같이 저녁 먹으러 갔다.
저녁으로 인생 첫 빠에야를 먹게 됐는데 밥을 먹는다는 것만으로 좋았는데 맛도 괜찮았다. 그러다 어쩌다 보니 2차로 피자까지 먹게 됐다. 광장 근처 야외 테이블에 자리 잡았는데 광장에는 마을 사람들이 여유롭게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그 틈에 나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피자도 먹고 얘기를 나눴는데 그 순간, 분위기가 참 좋았다.
빠에야도 먹고 피자도 먹고 배불리, 기분 좋게 좋은 사람들과 저녁을 먹었는데 한 가지 슬픈 소식이 있었다.
사모님이 발목이 좋지 않아서 아마 계속 걸을 수 없을 것 같다고, 이제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하셨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이 많이 들었고 항상 하나라도 더 챙겨주시려 하고 따뜻하게 대해주셔서 너무 감사했던 분들이었는데 오늘이 마지막 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아쉬웠다.
만남은 짧았지만 금세 이렇게 정이 들고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게 내가 알던 내 모습이 아닌데 이 길은 오늘도 또 다른 나의 모습을 알게 해 주었다.
5일 차가 되니 적응이 된 건지 어깨가 아프거나 발바닥이 많이 아프지는 않았다.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기대했던 또르띠야에 실망하고 동행들에게 서운한 감정을 느끼고 헤어짐을 겪게 되어 여러모로 마음이 좋지 않았던 하루였는데 좋아하는 지인들과 오랜만에 연락하고 이쁜 동네 구경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감정을 정리하고 동행들과 맛있는 저녁 먹고 웃고 떠들며 얘기 나누다 보니 다행히 괜찮아졌다.
하루에도 여러 감정들이 오가게 만드는 이 길인데 어제와 오늘은 부정적인 감정만 가득한 채로, 생각이 많아졌었는데 내일은 긍정적인 마음만을 가지고 걸을 수 있길, 내일도 어깨나 발바닥이 아프지 않고 무사히 잘 걸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