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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기이택생 Jun 28. 2021

파리는 낭만의 도시인 줄 알았어

왠지 헬조선보단 뭐든 나을 것 같잖아

교환학생으로 유럽에 살아 보기 전까진 막연한 기대감이나 환상을 가졌던 것 같아. 여유로운 사람들과 아름다운 건물들, 맛있는 음식과 낭만 가득한 공기 같은 거 말야. 왠지 헬조선보단 뭐든 나을 것 같잖아. 그리고 그 환상은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북역에서 동역까지 캐리어를 끌고 가면서 산산이 부서졌지. 옛날 그대로의 파리 시내 돌바닥은 캐리어가 부드럽게 밀리는 대신 요란법석 떨며 비틀거리게 만들더니, 결국 한 쪽 바퀴를 박살냈어. 낭만의 도시를 거닐 때 잘 어울리겠지 하고 꽃장식 달린 단화에 하늘하늘한 원피스 차림으로 파리에 왔는데, 발가락 끝으로 돌바닥 모양까지 다 느껴지더라. 다리가 아픈데 주저앉지도 못하겠으니까 미치겠더라고.

파리는 횡단보도까지 돌로 만들었다니까? 보기에나 예쁘지 걷기엔 어찌나 불편하던지.


아, 그리고 파리 신호등은 장식품이니? 차들이 얼마나 매섭게 달리던지 보행자 신호등이 켜져도 전혀 멈추질 않아. 북역 근처는 노숙자 천지에 치안도 안 좋더라. 공기에는 온통 오줌 지린내가 진동하고, 일 킬로도 안 되는 거리를 걸으면서 소매치기를 당할뻔 한 동양인 여자애를 두 명이나 봤어. 도와줄 여력도 안 되더라. 그저 내가 아닌 게 다행이다 싶었지. 그도 그럴 게, 걔들은 소소하게 주머니에서 뭘 빼가는 게 아니야. 한 명이 주의를 끌 동안 두세 명이 캐리어를 통째로 들고 도망가는 식이라고. 안 뺏기려면 캐리어에 온 몸으로 매달려야 하는데, 그동안 바닥에 질질 끌려서 옷이 다 찢어지고 나면 가방은 되찾아도 여행은 물 건너간 거지.


오는 길에 험한 꼴을 많이 보니까, 샹파뉴까지 가는 길엔 편히 기차 좌석에 앉아 갈 수 없더라. 하는 수 없이 내 몸만한 이민 가방을 짐칸에 싣고, 그 위에 앉아서 세 시간을 갔어. 멀쩡히 좌석을 예매해놓고 말야. 싼 맛에 예매한 기차표는 알고 보니 서행이었어. 진짜 가는 길에 역이란 역은 다 정차한 것 같아. 사람이 수도 없이 타고 내리고, 짐칸을 지나가면서 불어로 구시렁구시렁하는데, 꼭 나한테 하는 말 같더라고. 어깨가 얼마나 움츠러들던지, 사람들 눈도 못 마주치겠더라. 바닥을 보고 앉아서 오빠가 준 인형만 만지작거리며 버텼어. 벌써 보고싶더라.

지저분한 열차와 역에, 눈 앞에서 벌어지는 소매치기까지. 말 안통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눈물을 터뜨릴 지경이었어.


한 시간 정도 가니까, 건너편 짐칸에 어떤 여자애가 앉았어. 자기 몸뚱아리보다 큰 배낭을 바닥에 툭 내려놓더니, 그 위에 다리를 탁 벌리고 균형 잡아 앉아서 샌드위치를 꺼내 먹더라고. 이십 대 정도 되어 보였는데, 서양 애들은 우리보다 더 늙어 보인다니까 십 대였을지도 모르겠다. 아줌마들이나 입을 것 같은 까슬까슬한 재질의 보라색 등산복을 맞춰 입고 등산화를 신었어. 세상에, 황토색 등산화 말야. 아싸 되기 딱 좋은 차림이지 않니? 금색하고 갈색 중간쯤 되는 머리를 단정히 뒤로 묶고, 앞머리는 5대5로 옆으로 넘겼어. 눈도 큰데 아이라인은 또 엄청 둘러쳐 놨더라. 눈썹은 위를 향해 쎈 언니 스타일로 그려놨는데, 한국에선 안통하겠더라고. 그래도 하얀 피부에 보라색 눈동자가 예뻤어. 콧날이 얇진 않아도 오똑한 코에 도톰한 입술은 희끄무리했는데, 그게 또 흰 피부랑 잘 어울리더라. 무엇보다 비율이... 역시 인종을 잘 타고나야 하는 건가.


짐칸에 앉아가는 사람이 흔치 않으니까, 그 여자애를 한참 구경했거든. 이마를 까고 등산복을 입었는데 어쩜 그리 예쁘니? 좀 질투 나더라고. 지금 나는 얼마나 그지꼴일까 싶기도 하고. 내가 너무 쳐다봤나? 걔도 샌드위치를 먹다가 무심결에 날 봤어. 빨려 들어갈 것 같더라. 처음으로 눈을 마주친 서양앤데, 짐가방과 씨름하느라 지친 탓에 눈을 피할 기운도 없어서 멍하니 잠깐을 서로 바라본 채 있었던 것 같아. 정신을 차리고 나니까 두렵더라고. 뭐야, 왜 쳐다봐? 나한테 말 걸면 어쩌지? 이런 게 인종차별인가? 혹시 내 치맛단이라도 말려올라갔나? 그래, 쟤도 짐칸에 앉아가는 별거 없는 앤데 쫄지 말자. 별생각이 다 들었어. 그렇게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있는데, 그 애가 나한테 다가와서 말을 걸더라.


“안녕? 혹시 한국에서 왔어?”



이 글은 글쓰기 연습을 위해, 잡지에서 찾은 인물 사진으로 소설 속 캐릭터를 설계하여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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