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지 헬조선보단 뭐든 나을 것 같잖아
교환학생으로 유럽에 살아 보기 전까진 막연한 기대감이나 환상을 가졌던 것 같아. 여유로운 사람들과 아름다운 건물들, 맛있는 음식과 낭만 가득한 공기 같은 거 말야. 왠지 헬조선보단 뭐든 나을 것 같잖아. 그리고 그 환상은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북역에서 동역까지 캐리어를 끌고 가면서 산산이 부서졌지. 옛날 그대로의 파리 시내 돌바닥은 캐리어가 부드럽게 밀리는 대신 요란법석 떨며 비틀거리게 만들더니, 결국 한 쪽 바퀴를 박살냈어. 낭만의 도시를 거닐 때 잘 어울리겠지 하고 꽃장식 달린 단화에 하늘하늘한 원피스 차림으로 파리에 왔는데, 발가락 끝으로 돌바닥 모양까지 다 느껴지더라. 다리가 아픈데 주저앉지도 못하겠으니까 미치겠더라고.⠀
아, 그리고 파리 신호등은 장식품이니? 차들이 얼마나 매섭게 달리던지 보행자 신호등이 켜져도 전혀 멈추질 않아. 북역 근처는 노숙자 천지에 치안도 안 좋더라. 공기에는 온통 오줌 지린내가 진동하고, 일 킬로도 안 되는 거리를 걸으면서 소매치기를 당할뻔 한 동양인 여자애를 두 명이나 봤어. 도와줄 여력도 안 되더라. 그저 내가 아닌 게 다행이다 싶었지. 그도 그럴 게, 걔들은 소소하게 주머니에서 뭘 빼가는 게 아니야. 한 명이 주의를 끌 동안 두세 명이 캐리어를 통째로 들고 도망가는 식이라고. 안 뺏기려면 캐리어에 온 몸으로 매달려야 하는데, 그동안 바닥에 질질 끌려서 옷이 다 찢어지고 나면 가방은 되찾아도 여행은 물 건너간 거지.
오는 길에 험한 꼴을 많이 보니까, 샹파뉴까지 가는 길엔 편히 기차 좌석에 앉아 갈 수 없더라. 하는 수 없이 내 몸만한 이민 가방을 짐칸에 싣고, 그 위에 앉아서 세 시간을 갔어. 멀쩡히 좌석을 예매해놓고 말야. 싼 맛에 예매한 기차표는 알고 보니 서행이었어. 진짜 가는 길에 역이란 역은 다 정차한 것 같아. 사람이 수도 없이 타고 내리고, 짐칸을 지나가면서 불어로 구시렁구시렁하는데, 꼭 나한테 하는 말 같더라고. 어깨가 얼마나 움츠러들던지, 사람들 눈도 못 마주치겠더라. 바닥을 보고 앉아서 오빠가 준 인형만 만지작거리며 버텼어. 벌써 보고싶더라.⠀
한 시간 정도 가니까, 건너편 짐칸에 어떤 여자애가 앉았어. 자기 몸뚱아리보다 큰 배낭을 바닥에 툭 내려놓더니, 그 위에 다리를 탁 벌리고 균형 잡아 앉아서 샌드위치를 꺼내 먹더라고. 이십 대 정도 되어 보였는데, 서양 애들은 우리보다 더 늙어 보인다니까 십 대였을지도 모르겠다. 아줌마들이나 입을 것 같은 까슬까슬한 재질의 보라색 등산복을 맞춰 입고 등산화를 신었어. 세상에, 황토색 등산화 말야. 아싸 되기 딱 좋은 차림이지 않니? 금색하고 갈색 중간쯤 되는 머리를 단정히 뒤로 묶고, 앞머리는 5대5로 옆으로 넘겼어. 눈도 큰데 아이라인은 또 엄청 둘러쳐 놨더라. 눈썹은 위를 향해 쎈 언니 스타일로 그려놨는데, 한국에선 안통하겠더라고. 그래도 하얀 피부에 보라색 눈동자가 예뻤어. 콧날이 얇진 않아도 오똑한 코에 도톰한 입술은 희끄무리했는데, 그게 또 흰 피부랑 잘 어울리더라. 무엇보다 비율이... 역시 인종을 잘 타고나야 하는 건가.
짐칸에 앉아가는 사람이 흔치 않으니까, 그 여자애를 한참 구경했거든. 이마를 까고 등산복을 입었는데 어쩜 그리 예쁘니? 좀 질투 나더라고. 지금 나는 얼마나 그지꼴일까 싶기도 하고. 내가 너무 쳐다봤나? 걔도 샌드위치를 먹다가 무심결에 날 봤어. 빨려 들어갈 것 같더라. 처음으로 눈을 마주친 서양앤데, 짐가방과 씨름하느라 지친 탓에 눈을 피할 기운도 없어서 멍하니 잠깐을 서로 바라본 채 있었던 것 같아. 정신을 차리고 나니까 두렵더라고. 뭐야, 왜 쳐다봐? 나한테 말 걸면 어쩌지? 이런 게 인종차별인가? 혹시 내 치맛단이라도 말려올라갔나? 그래, 쟤도 짐칸에 앉아가는 별거 없는 앤데 쫄지 말자. 별생각이 다 들었어. 그렇게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있는데, 그 애가 나한테 다가와서 말을 걸더라.
“안녕? 혹시 한국에서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