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동네 감자탕집 앞에서 직장 선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녀 역시도 근처에 사는, 말하자면 동네 친구였다. 퇴근 후 전기장판 깔린 이불 속에 누워, 시답잖은 일 얘기로 메신저 속 그녀에게 애써 말을 붙여가던 그는 평생을 두고 후회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전기담요의 뜨끈한 열기에 몽롱해진 정신 탓인지, 갑작스레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함께 밥을 먹자고 메세지를 보낸 것이다. 그 메세지를 보내자마자 후회를 하며, 이불에 구멍이 나도록 이불킥을 하고 있던 그의 메신저가 울리더니-
- ‘그래요, 감자탕 콜?’
오 분 거리의 감자탕집 앞에 도착하는 데에는 딱 한 시간이 걸렸다. 어찌나 신경 쓸 것이 많은지. 미처 다 다리지 못해 살짝 접힌 스웨터의 왼쪽 어깨가 마음에 걸린 그는 주차된 차 위에 쌓인 눈을 한 움큼 주워 어깨에 문질렀다. 약속한 시각이 가까워져 올수록, 이 사태를 만든 조금 전 전기장판 위 그 녀석이 몹시 원망스러웠다. 그는 소변이 마려운 개처럼 감자탕집 앞을 이리저리 오가면서, 중얼거리며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명심해. 오늘 네 얘기 하러 나온 거 아냐, 장현서. 네가 할 일은 그저 묻고, 끄덕이고, 맞장구치고. 알았지?”
알바 5년, 사회생활 2년의 경력을 통해 어떤 사람과의 대화에도 통달한 그였다. 그래, 무서워할 필요 없다. 그렇게 주문을 삼십 번 정도 되뇄을까. 애써 심호흡을 하니 어느 정도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그녀가, 뒤에서 그의 등을 두들기며 이렇게 말하고는 방긋 웃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언제부터 기다렸어요? 춥죠? 빨리 들어가요.”
가게 안은 한적했다. 이럴 때는 차라리 정신없이 북적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이제 코로나까지 원망스러웠다. 그녀와 마주 앉으니, 그의 등 뒤로 땀 한줄기가 흘렀다. 그녀의 앞가르마에서 굽이치며 흐르는 갈색 머리카락은 귀에 가지런히 걸려있었다. 눈코입이 다 담긴 게 신기할 정도의 작은 얼굴 가운데에는 딱 좋은 위치까지 곧게 뻗은 코와 자그마한 붉은 입술이 그 존재를 또렷이 알렸다. 단정하고 짙은 눈썹 아래에는 맑고 동그란 눈이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그 눈이다. 그가 사준 숙취해소음료가 맛있다며 놀라 반짝이던, 지는 노을이 너무도 예쁘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열심히 하늘을 담아내던, 프로젝트 회의에서 성실히 답변한 그에게 좋은 의견 고맙다며 생긋 웃던. 그녀의 눈은 늘 당당하게 빛났다. 그는 그녀의 그런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서, 늘 도망치고 싶었다. 음식점 안에서도, 그는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의 앞에는 수저와 채워진 물잔이 놓여 있었다. 그녀가 차려준 것이었다. 아차, 그렇게나 잘하자고 다짐해놓고도 이런 기본적인 것조차 못하다니. 그는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는 그녀와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눈 것이 아니라, 몰아치는 감정에 휩쓸렸을 뿐이었다. 분명 그는 수도 없이 많은 걸 물어보고 그녀의 대답에 열심히 맞장구쳤지만, 대화가 이어진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다른 주제에 관해 얘기하기 시작하면, 어째서인지 앞서 얘기한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진주씨는 시냇물을 닮은 것 같아요!”
의식의 흐름대로 겨우 말을 이어가던 그는, 아무 두서도 없이 그녀에 대한 생각을 쏟아버렸다. 이 무슨 낭패인가. 그녀의 눈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녀가 시냇물을 닮았다는 그의 생각은 오래된 것이었다. 그녀만 허락한다면 왜 그녀가 시냇물 같은 사람인지, 흘러가는 달을 보며 밤새 조곤조곤 설명해줄 수도 있을 그였다. 그러나 둘에게 허락된 시간은 삼십여 분의 감자탕 한 그릇뿐. 그의 돌발적이었던 이 선언은 당황스레 웃는 그녀의 미소와 그에 뒤따르는 어색한 침묵에 사르르 녹아, 그들의 대화에서 사라졌다.
그는 집에 돌아올 즈음에야, 화젯거리가 떨어지면 꼭 써먹어야겠다고 집을 나서며 미리 생각해둔 주제들이 떠올랐다. 어젯밤 쓰리다고 했던 그녀의 속은 괜찮아졌는지, 프로젝트가 끝난 소감은 어떤지, 이번 휴가에는 무엇을 하는지. 후회 가득한 한숨을 내쉬며 방문을 열자, 그녀의 메세지를 받고 달려 나가며 내팽개쳤던 모양 그대로 구석에 처박혀있는 이불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에 그는 그만 웃음이 터져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