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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재오 Apr 02. 2020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 윤리학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

#인간의 가치탐색(인가탐) - 공리주의란 무엇인가 - 존 스튜어트 밀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분류 : 이론학, 실천학, 제작학


인간의 삶의 대부분의 고민이 행동이요, 윤리이며, 실천 등에 관한 것이다. 대부분의 문제는 인간 간의 갈등이요, 윤리의 문제이다. 지금 “내가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는 문제도 있다. 이런 문제로 필자는 수시로 기도한다. '무엇을 해야 가장 효율적인가?' 혹은 '가장 급한 일은 무엇이 있을까?'라는 순간적으로 필요한 행동을 묻는 문제가 바로 실천의 문제이고 이를 다루는 학문이 실천의 학문(practical science)라고 한다. 


또한 이 학문은 즉 “넌 어쩜 그럴 수 있어?” 등으로 나타나는 인간 간의 갈등 혹은 '상호 주관적인 문제(intersubjective problem)'를 함축한다. 이는  또한 '상호 인격적인 문제(interpersonal problem)'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갈등이나 충동들이 일어나는 가장 큰 문제들 중 하나가 가치관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가치가 행동을 낳고 그 행동의 기준을 연구하는 학문이 윤리학이요 도덕철학이다. 이런 인간적 행동과 소통(communication)의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 바로 윤리요, 도덕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러한 문제가 더 중요해진다. 


학문의 아버지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이론적인 학문과 실천적인 학문 그리고 창조적인(제작에 관한) 학문이다.


이론적 학문에는 철학(형이상학)과 물리학(자연학) 그리고 수학 등이 있다. 실천적인 학문은 윤리학이 있다. 창조적인 학문(혹은 제작학)은 예술에 대한 학문으로 “시학”, “수사학” 등이 있다. 실천의 학문으로서 윤리학은 지식보다는 행동을 중시한다. 왜냐하면 실천학의 목적은 행동에 대한 지식을 아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올바르게 행동하여 덕을 쌓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즉 앎보다는 함에 방점을 두어 유덕한 인간이 되는 것이 실천학의 목적이다.


행복해보이는 아이들

인간적 사회적 행동의 문제는 (윤리적) 가치관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이런 가치관에 중요한 기여를 한 이론이 18~19세기 영국에서 발전된 공리주의(功利主義 = utilitarianism)이다. 공리주의는 기본적 프레임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the greatest happiness of the greatest majority)이란 공식이다.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옳다 혹은 이를 추구해야 한다'라는 행위적인 함축이 깔려있다. 행복은 쾌락(pleasure)과도 같은 말이다. 그런 면에서 공리주의는 고대 윤리 사상인 쾌락주의(hedonism)와도 궤를 같이 한다. 쾌락주의 혹은 향락주의를 주창한 사람은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등이다. 쾌락주의는 특정한 철학의 유파라기보다는 인간의 보편적인 습관이자 민중들의 일반적인 가치관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에서도 나왔던 'Carpe Diem (Seize the Day)'이라는 구절이 쾌락주의의 한 양상을 보여준다. 이는 오늘 최대한 즐기라는 뜻이다.


종래의 쾌락주의 윤리의 약점 극복


이런 고대적인 쾌락주의의 현대적인 양태가 공리주의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식에서 보이듯이 이 현대적 향락주의는 나 하나의 쾌락이 아니라 다수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이럴 경우 쾌락주의자들에게 흔히 가해지는 비난 즉 '쾌락주의자=이기주의자'라는 누명을 벗어나게 된다. 그동안 '쾌락주의(hedonism)는 방탕한 것이다' 혹은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호색한들의 철학'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쾌락주의자는 저속하다, 자기밖에 모른다' 등의 비판도 많았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주의(Eudaimonism)는 너무 포괄적이어서 행동의 특정한 방향을 정해주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벤담이 주창한 대중적 쾌락주의인 공리주의(utilitarianism)는 쾌락주의의 새로운 발전을 야기했다. 자기 자신의 쾌락뿐만 아니라 타인의 쾌락까지 고려함으로 해서 공리주의는 기존 쾌락주의의 약점을 많이 커버했다. 따라서 공리주의는 현대까지 많은 사회문제나 경제학 그리고 공공복지 이론 등에 폭넓게 적용되고 있다.      


그런데 벤담은 “모든 쾌락은 질적으로 동일하다”라고 함으로써
또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그에 대한 비판은 다음과 같다.      

1) 공리주의는 돼지에게만 가치 있는 교리다. 이유는 그 쾌락만이 그 자체를 위해 바람직한 것이기 때문이다. 돼지의 쾌락이나 사람의 쾌락이 같다는 것이다.

2) 공리주의가 말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은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 이유는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을 창조하는 것이 항상 우리의 의무라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많은 요구라는 것이다.

3) 또 공리주의는 사람을 냉담하고 비감동적으로 만든다는 비판이 있었다. 좀 더 민감하고 공감을 요하는 행위의 특징 혹은 인간의 개성(character)이나 동기(motives)보다는 행동의 결과에만 집중하게 한다는 것이다.


사실 위의 세 가지 비판들은 현재에도 아주 실질적인 문제를 함축한다.      

1)의 경우, 피터 싱어(Peter singer)의 '생명윤리학' 내지 '실천윤리학' 개념이 이런 입장과 유사하다. 즉 살아있는 것은 다 똑같이 생명의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개의 생명이나 사람의 생명의 가치가 같다는 논리이다. 

2)와 3)은 아래 장에서 함께 설명하겠다.


밀의 질적 공리주의 등장


존 스튜어트 밀

존 스튜어트 밀이 그의 저서 <공리주의: Utilitarianism>을 집필한 목적은 그의 스승 벤담의 공리주의에 대한 비판을 반격하여 공리주의를 변호하기 위함이었다. 밀은 모든 공리적 윤리 원칙들이 도출된다고 말하는 효용 또는 최대 행복 원칙을 단일 윤리 원칙으로 정립한다: 효용(Utility)의 원칙이 바로 최대 행복의 원칙(the greastst-happiness)과 같은 말이다.      


☞밀의 공리주의 개념 정리

최대 행복은 인간 행동의 원칙으로서 이 “원칙에 따르는 행동은 옳다(right)”라고 밀은 옳음(righteousness)의 개념을 정의한다. 더 나아가서 사람이 항상 이 원칙에 따라 행동은 하기 어렵다. 그래서 밀은 공리주의 규칙을 따를수록 사람은 더 윤리적이게 되며 그만큼 옳다고 한다. 


그 이유는 우리는 무엇이 옳은지 무슨 행동을 지금 해야 하는지 공리주의 윤리학 없이도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다쳤다고 하면 좌고우면(左顧右眄)할 것 없이 그 사람에게 관심을 쏟고 119에 신고를 하거나 어떠한 응급처치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the Good Samaritan parable)에서처럼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우리의 친구이기 때문이다.


또 정반대로 공리주의 원칙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정도에 따라 사람은 비윤리적으로 된다. 실천의 철학은 이처럼 정합적으로 체계적인 사고와 그에 따르는 실천을 요구한다. 위에서 말한 예에서 보듯이 공리주의 윤리학은 우리의 상식과 많이 다른 부분이 있다. 


공리주의 윤리학은 계산의 윤리이고 결과주의 윤리학이다. 여기서 계산이란 이기적인 타산(打算)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의 결과가 어떤 양적 변화를 가져올지를 행동하기 전에 미리 예측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무엇이 옳은지 이미 알고 있다. 문제는 그 옳은 것을 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류의 윤리학은 동기 주의 윤리학, 직관주의 윤리학 그리고 의무론(deontology)라고 한다.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와 반대의 윤리학적 사상들이다.


밀은 또한 행복과 쾌락을 같이 본다. 행복이란 말은 쾌락을 의도한다. 행복은 또한 고통이 없는 것이다. 불행이란 고통이고 쾌락이 없는 것이다. By happiness is intended pleasure, and the absence of pain; by unhappiness, pain, and the privation of pleasure." 

공리주의는 돼지에게만 맞는 교리라는 비난에 대해 밀은 쾌락은 질이 아니라 양적으로만 다르다는 벤담의 견해를 일축한다. 그는 육체적 쾌락과 지적 쾌락을 모두 경험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자를 크게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밀은 동물이나 바보 혹은 극히 무식한 사람들이 획득할 수 있는 육체적 쾌락을 가지기 위하여 그들처럼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논증한다.      


그리고 밀은 '사람들이 실제로 원하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이다'라는 명제를 수립한다. "무엇이 바람직하다는 것의 유일한 증거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것을 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밀은 벤담의 모든 쾌락의 동질성 이론에 반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지적인 쾌락(예: 우정, 예술, 독서, 대화의 즐거움)이 육체적인 쾌락보다 더 높고 더 바람직한 종류의 쾌락이며 또 장기적인 행복을 위해서 사람은 더 높은 능력을 개발해야 한다. 여기서 합리성이 쾌락, 행복 추구의 수단이 됨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운동을 하는 것은 순간적으로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그것을 연습하면 건강하게 되고 장기적으로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사람은 순간적인 감각적인 쾌락보다는 지덕체의 연마를 통한 장기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공리주의 원칙에 부합하는 옳은 행동이다.


공리(Utility) 혹은 행복 계산에 대한 비판과 이에 대한 밀의 재비판


일반적으로 볼 때 공리를 계산할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주어진 행동이 장래의 행복에 대해 어떤 영향을 끼칠지 계산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밀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응답한다. 우리가 흔히 아는 도덕적 규칙 예를 들면 “약속을 지켜라” 혹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 와 같은 것은 그 자체로 옳은 것이 아니라 그런 행위들이 대체로 좋은 결과를 산출했기 때문에 그런 규칙이 옳다고 인정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밀은 2단계 전략을 고려한다. 즉 그런 규칙들은 2차로 옳은 것이다. 그래서 보통은 아무 생각 없이 그런 규칙을 따르면 된다. 그러나 그런 규칙이 공리의 원칙과 충돌하는 경우에는 부득불 그 규칙을 최초의 원칙이 공리의 원칙 즉 최대 행복의 원리에 비추어보아 그 타당성을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도덕규범이 사회의 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한 오랜 경험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공리주의 체계 내에서 우리가 보통 진리라고 믿고 있는 상식적인 도덕률들이 정당화되어진다. 이를 밀은 2단계 전략이라고 한다. 공리의 원칙이 가장 근본적이지만 전통적인 도덕규범이 사회의 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한 오랜 경험으로 나타났다고 보기 때문에 이런 정통적인 도덕규범도 공리주의 내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약속을 지켜라” 혹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 같은 도덕규범은 하나의 파생적인 원칙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논평 - 공리주의는 하나의 완결된 도덕의 시스템이다. 


문제는 모든 규범 윤리학이 그러하듯이 공리주의 윤리학 역시 근본적인 질문 즉 존재(Sein)에서 당위(Sollen)를 도출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영국의 회의주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이 지적한 Is-Ought 문제가 있다. 즉 밀이 자주 주장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A를 원한다”라는 명제에서 “A는 바람직하다”를 도출하는 문제다. 즉 G.E.Moore가 말하는 자연주의적인 오류(naturalistic fallacy)를 범하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 이런 방식으로 살고 있다. 자신의 이익이나 쾌락뿐 아니라 타인들의 이익과 쾌락을 위해 생각을 많이 한다. 그리고 “거짓말하지 마라”라는 기본적 도덕규범이 얼마나 많이 깨어지는지 기억하면 공리주의 윤리의 장점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선의의 거짓말(White Lie)”의 경우이다. 말기암 판정이 난 환자에게 가족들이 사실을 알려주는 것은 도리어 해로울 수 있다. 혹은 일제 시대 독립운동가를 잡으러 온 일본 순사에게 독립군의 위치를 알면서도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한국 외국어 대학에서 전공은 영어학을 하고 부전공을 철학으로 했는데 그때 장욱 교수님에게서 프랑켄나의 윤리학 교재를 배우면서 필자는 교수님에게 공리주의와 의무론 윤리가 어떻게든 결합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다. 어느 쪽 시스템도 완벽하지 않다. 각자는 스스로 윤리의 체계를 만들어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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