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無知)의 지(知), 소크라테스적 논박
내가 무엇을 모른다는 인식이 참다운 인식의 토대가 된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플라톤의 저서이다. 이는 실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에서 “청년들을 도덕적으로 타락시킨다”와 "신에 대한 불경죄(impiety)"의 죄목으로 고발되었을 때 피고인의 진술에 해당한다. 이 책은 거의 소크라테스의 발언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소크라테스를 고소한 사람들은 두 종류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첫 번째로는 오래전부터 그를 비판하고 고발한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에는 대표적으로 당시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있는데, 그는 소크라테스가 “현인(賢人)인 체하면서 하늘에 있는 것을 살피고 땅속에 있는 모든 것을 탐구하여, 옳지 못한 이론을 올바른 도리인 것처럼 들려주려고 한다”라고 비난을 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자연철학자가 아니다” 혹은 “나는 물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고소인들을 반박한다. 당시의 자연철학은 예를 들면,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고 한 탈레스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관심은 자연이 아니었다. 그의 관심은 주로 인간의 행동과 그 기준이 되는 정의 혹은 덕(德) 개념이었다. 그리고 국가 공동체의 올바른 가치관을 탐구하는 일이었다.
그다음 대중들이 분노한 까닭은 “소크라테스가 지혜롭다”는 명성이었다. 대중들은 그가 똑똑한 체한다며 시기했다.
여기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바로 “무지(無知)의 지(知)” 혹은
“소크라테스적인 지혜(Socratic Ignorance)”이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서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라고 표현된다.
I know only one thing-that I know nothing.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은 무엇을 모르면서도 안다고 하여 발생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와 달리 자신이 무엇을 모른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식의 탐구를 시작한다. 그의 탐구는 자신의 무슨 새로운 학설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시 그리스 사회에서 널리 인정되었던 통념이나 유명한 지식인들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당시의 유명 지식인들이나 장인들(craftsman) 혹은 철학자들(소피스트들)은 유식한 것처럼 떠들어내나 실은 그들은 개념을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이것을 통해서 소크라테스는 당시의 잘 나가던 소피스트들과 정치인 등 유명한 사람들의 무지를 폭로해서 젊은이들의 각광을 받았다. 이 때문에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미움을 받아 결국 사형을 선고받았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인 『변명』을 보면 당시의 사회풍조가 잘 나타나 있다. 당시의 지식인이라고 뽐내던 소피스트들은 스스로 사회적인 능력과 기술을 돈을 받고 가르치고 있었다. 즉, 그들은 토론이나 재판 혹은 대중집회에서 상대를 압도하는 변론술, 웅변술을 팔고 다녔었다. 위에서 말한 사회적인 능력과 기술을 흔히 덕(德, arete)이라고 부른다. 이는 동양적인 군자의 덕(德)과는 다소 다른 개념이다. 당시 덕의 뜻은 탁월성, 능력 혹은 뛰어남(excellence)이다.
아리스토파네스로 대변되는 민중적인 증오심과 더불어 소크라테스에게 더 두려운 것은 현재 그를 고소한 사람들이었다. 대표적인 인물 세 사람이 나온다. 멜레토스와 아뉘토스 그리고 뤼콘이었다. 멜레토스는 작가, 시인들을 대표하여 고소하고, 아뉘토스는 장인들과 정치가를 대표하며 뤼콘은 변론가들을 대변한다. 그런데 멜레토스는 독자적인 고발인 혹은 검사가 아니라 부유한 명망가인 아뉘토스의 도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소크라테스의 법정 상대방은 주로 멜레토스이다. 이들의 고소 이유가 위에서 말한 청년들의 도덕적 타락과 불경죄이다.
원고 측의 법정 대리인인 멜레토스는 소크라테스가 “신을 믿지 않는다” 혹은 “국가가 인정한 신을 믿지 않는다”며 그 결과 죄를 범했다라고 유죄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개인적으로 다이몬이란 신(神)을 믿고 그 신이 시키는 대로 복종하는 철저한 종교인이었다.
그리고 다이몬은 당시 아테네가 인정한 신이었다. 따라서 멜레토스와 원고 측은 고소는 논리적으로 완전히 실패한다. 그는 신의 명령으로 전쟁터에서 끝까지 진지를 수비를 하였고 “신의 명령에 따라 나 자신과 남들을 살피면서 살았습니다”라고 자신을 변호한다. 그러나 배심원들은 원고 승소의 판결을 내린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질투와 중상 때문이었다.
이상은 주로 플라톤의 “변명”에 의지한 소크라테스 측의 항소 이유서이다. 다른 맥락에서는 아뉘토스가 당시 아테네의 민주파였고 소크라테스는 민주파를 싫어했다는 말도 있다. 복잡한 역사적 배경 설명은 줄인다.
그런 사회 분위기에서 소크라테스는 델포이의 신탁에서 그가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자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그는 이를 즉시 인정하지 않고 왜 다른 당시의 똑똑한 사람들을 놔두고 자신이 가장 현명한 자인지를 계속 스스로 물어보고 또 당시의 현명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지혜와 식견을 판단한다. 위에서 미리 언급한 것처럼 당시의 유명한 사람들은 덕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에 대해 한결같이 특수한 답을 제시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묻는 것은 Arete(= 덕)의 일반적인 정의(定義)인 것이었다 : 소크라테스는 덕(德)의 본질을 물었는데 사람들은 덕(德)의 특수한 경우를 나열한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지식인들과 소크라테스의 차이점은 전자는 덕(德)의 본질이 모르면서 잘 안다고 착각한 것이요, 후자는 모르면서 모른다고 스스로 인식한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해서 소크라테스는 델포이의 신탁, 즉 자신이 당시 가장 현명하다는 명제를 이해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물의 본질은 그 사물의 정의(正義, definition)를 알아야 비로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정의는 기초 개념(basic consept)과 같은 말로써 이것을 모르면 대화나 탐구가 불가능하다.
소크라테스는 따라서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
"분명히 저 사람은 나보다 더 지혜롭지 못하다. 그 사람과 나는 선(善)이나 미(美)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는데도, 그 사람은 자기가 모르는 줄을 모르고 있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어떠한가? 나는 내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대수로운 것은 아니겠지만, 나는 내가 모르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기에 그 사람보다 더 지혜로운 것이 아닐까?" (“변명” 플라톤 전집 3권 29쪽)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진리를 모르지만 무엇이 허위인지는 잘 파악하고 있었고 따라서 당시의 소피스트들의 잘못과 또 지도자들의 무지를 여지없이 폭로할 수 있었다.
이런 소크라테스의 폭로 방법을 “소크라테스적 논박(Socratic Elenchus)”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기성 정치인들의 허위를 벗기고 상대의 약점을 노출함으로써 진리를 찾는 젊은이들이 스스로 지식을 잉태하고 산출하게끔 도와주었다.
따라서 젊은이들은 소크라테스에게서 배워서가 아니라 그와 교제하는 가운데서 "자기 스스로 여러 가지 훌륭한 것을 출산하는 것일세"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청년들은 기성세대의 거짓이 폭로되는 것을 보고 자신의 비판적인 논점을 개발하고 창의적인 생각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그가 억울하게 독배를 마시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는 다시 말하면 당시의 불순한 지식인이었고 청년들에게 불온한 이념을 선동하고 반국가적인 일을 사주, 교사한 죄목으로 고발되었던 것이다. 또한 아테네의 종교를 모독하고 새로운 신(神)을 소개했다는 죄목으로 고발된 것이었다. 이것이 잘못임을 위에서 밝혔다. 또 이는 그가 얼마나 애국자인지 알면 오해가 풀릴 수도 있었다.
그의 철학과 지혜에 대한 사랑 그리고 죽음마저도 초월하는 도덕과 정의에 대한 열정은 플라톤을 비롯한 많은 후대인들의 귀감이 되었고 진정한 서양철학을 시작하는 모퉁이돌이 되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 재판에서 보이는 것처럼 민주주의는 역사상 최고의 정치제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결함이 있을 수 있다.
또 불경죄라는(impiety) 두 번째 죄목은 증거를 찾기도 어렵고 모든 것이 날조, 왜곡될 수 있는 사안들이었다. 그러나 아테네의 어리석은 시민들은 그에게 날조된 죄목을 씌워 결국 유죄판결을 내렸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재판정에서 흉악한 강도 대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마태복음 27장)” 외친 당시의 유대인들과 같았다.
소크라테스는 오늘날의 정치적인 이유로 잡혀가서 옥살이하는 양심수와 같다. 억울한 사람을 심판하는 사정은 오늘날과 다를 바가 없다.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고 참으로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성서의 구절을 상기시킨다.
무지의 지 혹은 소크라테스적인 지혜 그리고 소크라테스적 논박술은 모두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런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청년들은 구시대적인 관습이나 고정관념을 탈피하고 스스로의 독창적인 사유를 펼쳐나갈 수 있었다. 그 결과,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플라톤 학파 외에도 ①메가라 학파 ②엘리스-에레트리스 학파 ③키니코스 학파 ④키레네 학파라는 4학파를 형성하는 기틀이 되었다.
필자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maieutic)에서 서양적 학문과 교육의 이념을 본다. 이는 외부적인 것, 예를 들면 교사나 교재 등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적인 영혼, 정신이 진리와 지식의 모태라는 것이다. 교사나 교재는 영혼이 진리를 산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산파와 참고서의 역할에 불과한 것이다. 지식의 자기 산출이(Selfproduction of knowledge) 학교교육의 최종목표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많이 배우고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발견하고 발명하고 창조하는 것에 교육의 목표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 한국의 입시위주의 주입식 또는 암기식, 문제풀이식 학습은 잘못된 것이다. 공식을 이용한 응용문제의 풀이가 아니라 그런 공식과 원리를 스스로 도출하고 이해하며 다른 것들(공식, 원리)과의 연관성을 추구하는 눈을 열어 주도록 해야 한다. 이는 또 성현의 말씀은 무조건 외운다는 동양적, 유교적 교육원리와도 다른 것이다. 이런 소크라테스의 고유한 교육방법론인 산파술은 그러나 그의 제자 플라톤에 의해 상기설로 바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