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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재오 Mar 20. 2020

사회적 거리두기의 시대, 철학  - 하이데거와 죽음론

실존주의 철학에서 본 죽음의 의미

잠시 멈춤, 그리고 사회적 거리두기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마주친다.

 사회 전체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암울하다. 감염자가 속출하고 대구에서는 기저질환도 없는 17세 소년이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는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났다. 코로나 19의 급격한 확산을 막을 뿐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 감염병을 극복하고 다시 밝은 날을 맞이하기 위해서, 당장 해야 할 일 중 하나가 바로 “사회적 거리두기”이다. 단체 생활, 사회생활은 가급적 자제하고 집에만 있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이런 때 한번 묵상해 싶은 사상이
바로 실존주의(existentialism)이라는 철학이다.


실존주의는 전반적으로 인간의 사회성보다는 개인성, 고립성 등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본다. 즉, 사회적 교류와 환락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상실하고 대중화, 평균화, 세속화된다는 것이다. 한 때 이 철학은 일본과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었다. 그 후 포스트모던 철학이 일대 광풍을 일으키더니 이 역시 잠잠하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철학은 흔히 실존철학이라고 불리어진다. 실존(Existence)개념은 원래 중세 철학의 개념이었으나 현대에 와서 새로운 각광을 받고 있다. 중세에서 실존의 뜻은 본질(essence)과 대립되는 개념으로써 유한한 존재자는 그 구성에 있어 본질과 실존이 합성되어 있다. 내가 돈 100만 원에 대한 완벽한 개념이 있어도 그것이 실제로 내 앞에 존재하는지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유한적인 모든 것은 항상 실존과 본질이 분리될 수 있고, 그 반면 무한한 존재인 신(神)의 경우는 본질이 바로 실존이다. 따라서 양자는 분리될 수 없다.


예를 들면, 필자의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다.
그러나 필자는 그 모습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즉, 어머니의 본질은 필자의 마음에 남아 있으나 실존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본질과 실존의 관계이다.


이런 중세적 스콜라 철학적인 실존의 개념을 하이데거를 비롯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실존에서 인간 존재의 특별한 양상을 찾았다. 그들에 의하면 인간만이 고유한 실존적인 존재이다. 그 반면 중세에서는 모든 사물이 실존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하이데거는 그의 주저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를 썼다.


“존재와 시간”에 의하면 인간의 존재가 모든 사물의 기초가 된다. 여기서 인간이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신체를 지닌 일상생활적인 인간이 아니라 그 이전의 존재 즉 세계와 근본적인 관계를 맺고 그 속에서 자신을 던진 존재를 말한다. 이런 인간의 존재를 하이데거는 현존재(Dasein)이라고 한다. 현존재 분석을 통해서 여타 학문들의 토대를 추구하는 것을 하이데거는 실존론적-존재론적 분석이라고 한다. 이런 실존론적-존재론적 분석의 일차적인 대상은 현존재이다.

현존재(Dasein)의 의미는 '그 자신을 앞서있고 세계 안에 있고 존재자 옆에 있다. (Sich-vorweg-schon-sein-in-(der-Welt)-als-Sein-bei innerweltlich begegnendem Seienden)'라고 한다.


이를 하이데거는 실존의 구성틀이라고 한다.
“앞서 있다”라는 말도 하이데거의 중요한 개념으로서
인간은 항상 미리 생각을 한다는 점이다.


몸은 여기 있어도 마음은 항상 다음 일을 향해 있다는 점이다. 이런 하이데거의 인간 이해는 어쩌면 상당히 긴장되고 초조한 현대인들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즉, 놀거나 즐길 때 우리는 앞을 생각하지 않고 순간적인 현실에 만족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이렇게 긴장되고 염려하는 존재로 본다. 사실 이것이 하이데거 류의 실존 철학의 근본적인 특징이다. 그들은 인간의 한계상황을 중시한다. 죽음이나 질병 혹은 고통 혹은 죄(罪)같은 사건을 무척 중시한다.


그다음 세계 내 존재(In der Welt Sein)에 대해서 말하면 이렇다.
인간의 근본 존재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세계를 향해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외부 세계를 향해서 열린 존재를 말한다.


하이데거의 세계(Welt)는 지구나 달이나 별 같은 우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방식을 말한다. 인간의 세계 개방성 때문에 우리는 환경이나 자연 등에 대해서 그들과 교섭할 수 있으며 연구할 수도 있다. 따라서 자연에 대한 학문도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존재자 옆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자신의 특수한 존재 형식을 잊고
마치 나 역시 하나의 사물인 것처럼 취급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 역시 잘못은 아니다. 단,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론적 우수성을 모르고 일상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근본적 특성은 하이데거 같은 학자들에 의해서 겨우 알려진다. 이를 하이데거는 퇴락(Verfall)이라고 한다. 퇴락 혹은 타락이나 일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고유한 존재 방식을 말한다.


위와 같은 인간의 현존재에 대한 실존론적인 분석의 결과

하이데거는 불안(Angst)과 신경 씀(Sorge)라는 더 깊은 범주를 파헤쳐낸다.


염려는 인간의 전체성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즉, 위에서 말한 “앞에 있음(먼저 있음)”, “안에 있음” 그리고 “옆에 있음” 이란 세 가지를 아우르는 인간 존재(현존재)의 종합적인 모습이 불안과 염려로서 나타난다. 여기서 “신경 씀”이란 보통 우리가 말하는 걱정이나 염려와는 다른 범주로서 존재론적 실존론적 의미를 가진다. “신경 씀(Sorge)"인간의 마음이 항상 어디 어디로 향해 있다는 말이다. 이 '신경 씀'의 현상은 불안의 심리 가운데 가장 잘 나타난다. 인간의 모든 행동이 신경 씀을 수반하지만 보통은 이를 잊고 있다가 불안의 감정 가운데 이것이 제대로 포착이 된다. 이런 차원에서 “신경 씀(Sorge)”을 하이데거는 인간의 본질로 본다. 하이데거의 용어로는 “신경 씀(Sorge)은  현존재(Dasein)의 존재(Sein)”라고 한다.


“신경 씀(Sorge)”의 현상과 더불어 죽음(Tod)의 개념이 다루어진다.


 죽음은 우선 타인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체험된다. 당연히 자신의 죽음을 넘어서는 아무것도 없으니 타인의 죽음을 먼저 경험하게 된다. 타인의 죽음 즉, 부모나 친척 혹은 친구들의 죽음을 통해서 인간은 죽음의 의미를 반추하게 된다. 특히 시신을 보면서 슬퍼하고 고인의 인격을 생각할 수도 있다. 여기서 죽음은 물리적 사건으로 나타난다.


하이데거의 죽음은 위에서 말한 “신경 씀(Sorge)”의 현상을 통해서 파악된다. '끝' 혹은 '마지막'이란 사건에 “신경 씀(Sorge)”이 죽음이다. 실존론적-존재론적 죽음의 의미이다. 죽음은 삶의 일부이다. 하이데거의 죽음 분석은 철저히 내 세계적(innerweltlich)이다. 죽음 이후의 삶, 영생, 극락 등은 다루지 않는다. 이런 차원에서 하이데거는 '죽음의 형이상학(Metaphysik des Todes)'을 구상한다. 현존재는 죽음으로의 존재(Sein zum Tode)이며 죽음은 인간의 존재 방식이다. '인간은 죽음을 산다.'

죽음은 삶의 마감이나 삶의 완성이 아니라 실존의 특유한 방식이다.


죽음은 단순한 사건이나 소여(주어짐)가 아니라  "각자의 것(Jemeinigkeit)"와 "실존(Existenz)"을 통해서 비로소 파악이 된다. 이처럼 하이데거는 죽음에서 인간 존재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도 사도 바울이 “나는 매일 죽노라”라고 하는데 이와 비슷한 생각이다. 죽음 속에서 인간은 철저히 개체화되고 따라서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보게 된다.


이런 것을 하이데거는 죽음에로의 선구적인 결단이라고 한다. 죽음에로의 선구적인 결단을 통해서 인간은 일상성 속에 함몰된 타성적인 삶을 버리고 고유한 가능성과 만나게 된다. 불안과 긴장 속에서 인간은 죽음으로의 자유를 맛보게 된다.


이는 상당히 영웅적인 삶을 의미한다. 보통의 일상적인 삶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철학적 태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사는 현대인의 생활철학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죽을 용기 없이는 삶의 질적인 변화를 누리기 힘들기 때문에 하이데거의 죽음의 선구적 결단이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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