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재오 Mar 31. 2020

악의 진부성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인간의 가치탐색(인가탐) - 악의 진부성: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나 아렌트)

들어가기 : 홀로코스트와 윤리


홀로코스트 기념관

인류가 저지른 최악의 집단적 범죄 중 하나가 독일의 나찌 정권하의 유태인 집단 학살(홀로코스트, Holocaust)이다. 히틀러는 1차 대전 후 전후 배상금, 인플레이션 그리고 1929년의 대공황 등의 문제로 경제가 극히 열악하고 국민들의 불만과 불안이 극도로 팽배했던 당시의 독일 사회를 유린하기 위하여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Nazi)”을 조직한다. 나치는 세계 최초로 “고속도로(Autobahn)”를 건설하고 산업 부흥을 장려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 현실의 모든 문제를 유태인들에게로 돌리는 수법을 사용한다.


나치는 인종주의를 펼쳐 게르만족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유태인과 집시 등의 소수민족과 동성애자와 장애인들을 살 가치가 없는 생명들이라며 끔찍한 박해를 시작했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종전 후 대부분의 나치들은 전범으로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수많은 유태인들을 체포하여 유태인 집단거주지(ghetto)로 이동시키거나 “박멸 수용소(extermination camp)”로 보내는 일을 주도한 "아이히만"은 종전 후에 연합군의 수사를 피해 숨어 지내다가 결국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의 첩보 단체 모사드에 의해 체포되어 예루살렘으로 보내진다. 예루살렘에서 아이히만에 대한 특별 재판이 벌어지고 이를 보고하는 글이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책이다.


유대-미국의 철학자이자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젊은 시절의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Johanna "Hannah" Cohn Arendt, 1975년 12월 4일)는 부유한 유대인 상인 가문으로서 독일의 하노버에서  태어났으나 그 후 그녀는 대체로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성장했다. 그녀는 마부르크 대학에서 유명한 철학자 하이데거(M.Heidegger) 아래에서 공부를 했고 하이데거와 짧은 염문이 있었다. 하이데거는 평생에 걸쳐 아렌트의 사상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박사 학위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역시 당시의 유명한 실존주의(實存主義)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지도로 성취했다고 한다.


20세기 최대의 정치학자의 한 사람인 한나 아렌트의 학문적인 성향은 전체주의(Totalitarianism) 분석과 정치 행동 이론 분석, 인식론(epistemology) 등 다양하다. 특히 유태인으로 독일에서 태어나 뛰어난 학문적인 역량에도 불구하고 히틀러 정권의 박해를 받아 이리저리 피신해 살다가 생의 후반에는 미국에 귀화하여 많은 학문적인 업적을 산출한 바 있다. 


유대인 학살의 협력자,

아이히만 (Otto Adolf Eichmann)


아렌트가 취재한 아이히만(Otto Adolf Eichmann, 1906-1962 독일 프러시아 제국)은 독일 노드라인 베스트팔렌주의 졸링겐(Sollingen) 출신으로 부친을 따라 오스트리아로 가서 부친의 사업을 도왔다. 그는 오스트리아 린츠(Linz)에서 국가 고등 실업학교(Staatsoberrealschule)에 입학했는데 흥미로운 점은 악독한 지도자 히틀러도 그 학교를 아이히만 보다 17년 전 다녔다는 사실이다. 공부를 못한 아이히만에게 특별한 것이 없고, 몇 군데 취업을 하다가 당시 붐이었던 나치당과 친위대(SS)에 가입한 것이었다. 이것이 그의 장래의 모든 행운과 불행의 시초였다.


아이히만은 나치의 유대인 박멸 정책에서 주로 유대인들을 한 곳에 집결시켜 거주하게 했고, 그다음에는 죽음의 수용소로 유대인들을 운반하는 역할을 했다. 전쟁 후에 그는 일시 미군에 의해 체포되었으나 서류를 위조해서 아르헨티나로 도망을 갔으나 이스라엘 정보국 모사드 요원들에 의해 체포되었고, 아르헨티나 정부 몰래 이스라엘로 납치가 되어 1961년 4월 11일 15가지 죄목으로 기소되어 예루살렘 지방법원에서 재판에 회부되었다.


나치 및 그 부역자 처벌법


그를 법정에 내세운 근거 법률은 1950년 이스라엘에서 제정된 “나치 및 그 부역자 처벌법”이었다. 이 법에 따르면 “유태인에 대한 범죄 행위들 가운데 하나라도 범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한다. 이 규정은 상당히 가혹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치 치하에서 600만 명의 유태인들이 아무 죄도 없이 단지 그들이 유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한 것을 염두에 둔다면 그렇게 가혹하지 않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태 복수법(同態復讐法)은 엄연한 형벌의 근본적 원리이다. 


당시 피고 아이히만 측 변호사는 무죄를 주장했다.


피고가 당시 존재하던 나치의 법률 제도하에서는 어떠한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고 그가 기소당한 항목들은 범죄가 아니라 “국가의 공식 행위”이므로 다른 어떤 정부도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했다. 또한 그는 “나는 유태인이든 비유태인이든 죽인 일이 없다”고 했다.


이 부분에 대한 필자의 의견은 이렇다 : 설령 아이히만이 직접 유태인들에게 살인가스를 방출하여 죽이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는 수많은 유태인들을 살해 장소로 데려가는 일을 했기 때문에 살인에 협력을 했다는 죄(罪)가 있다. 그리고 아이히만이 자신의 유태인에게 가한 행위들이 단지 국가의 명령이므로 죄가 없다는 논리도 성립이 될 수 없다. 


법 실증주의(1)에 따르면 국가의 법률이 없으면 죄도 없고 벌도 없다. 
그러나 이 경우 자연법(自然法, natural law)이란 것이 있고
또한 죄란 국가와 민족을 초월해서 성립하는 부분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일제 시대나 공산 치하에서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그 시대와 통치 법률에서는 죄가 아니었으나 해방 후나 정부 수복 후에는 그들의 죄를 물을 수 있는 이치와 같다.


아이히만이 나치의 주구(走狗)가 되어 수십만의 유태인들을 동유럽에서 이동시키고, 결국은 죽음의 수용소로 보낸 것을 보고 우리는 그가 히틀러식의 광적인 인종주의, 게르만족, 아리아족  우월 사상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도리어 그는 한 때 유대인의 정신적인 지주로 인정된 테오도르 헤르츨이 쓴 시온주의의 고전인 <유대국가>를 읽고 그는 시온주의로 개종한 적이 있다고 했다. 즉 아이히만이 수많은 유대인들을 게토로 끌고 가서 집단 수용을 시키고 나중에는 죽음의 수용소까지 수송을 한 것은 유대인에  대한 어떤 편견이나 증오심 때문이 아니라 단지 공무원으로서 국가와 지도자의 법과 명령을 따른 관료에 불과했다.      


칸트의 도덕철학의 남용(濫用)


아이히만은 조직의 상부로부터 범죄적인 명령을 받고서도 이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수행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발생한 적이 많다. 그런데 아이히만은 자신이 잘못된 상부의 명령을 받고 거침없이 이를 수행한 이유를 그가 칸트(Immanuel Kant)의 도덕철학을 배웠기 때문이라고 해서 주목을 받았다. 


그는 칸트의 정언명령을 정확히 암기하고 있었다.
“나의 행위의 준칙이 언제나 일반적인 법률의 원칙이 될 수 있도록 하라
(Handle nur nach derjenigen Maxime, durch die du zugleich wollen kannst, dass sie ein allgemeines Gesetz werde)”


임마누엘 칸트

여기서 행위의 준칙이란 개인적인 신념이나 철학 등을 말한다. 가령 “돈을 남에게 꿔주지 않는 게 나의 신념이다”와 같은 말을 할 때 이것이 바로 그 사람의 행위의 준칙인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쓰레기는 아무 데나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를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행한다면 이것 역시 그 사람의 행위의 준칙인데 이런 준칙은 보편화될 수가 없다 즉 행위의 준칙이 보편적인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면 세상은 곧 쓰레기산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히만의 문제는 이 원칙을 가지고 행동 한마다면 유대인을 대량 학살하라고 시키는 그런 명령을 따를 수는 없다. 아이히만은 머리가 좋지 않고 학교 공부는 적게 했으나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을 읽었다. 그러나 그에게 유대인 청소라고 하는 과업을 부여받는 순간 그는 칸트의 원칙대로 사는 것을 포기했고 그 자신의 표현처럼 “국가에 의해서 범죄가 합법화된 시대”에는 더 이상 칸트의 정식이 더 이상 적용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다음과 같이 왜곡해서 읽었다는 것이다. 


“네 행위의 원칙이 총통의 명령과 일치하게 행동하다”는 식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 자신이 알던 철학마저도 왜곡하여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한 셈이다.


어떤 면에서는 칸트의 도덕철학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칸트의 도덕 규칙의 장점은 종래 도덕철학의 약점을 합리적으로 고쳤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면 종래의 도덕철학은 '항상 선(善)이란 무엇인가? 또 정의(正義)란 무엇인가?'하는 물음에 답을 하여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플라톤 같은 형이상학적 윤리학은 “선(善) 자체(The Good itself)” 등이 존재한다는 믿음에서 출발을 했다. 그러나 현대의 윤리학이 밝히는 바와 같이 “선(善) 자체” 혹은 선(善)의 개념을 정의하기 불가능하다. 따라서 윤리적 회의론이 득세를 하고 있다.


이런 사정이 이해는 된다. 일상 언어 분석 철학의 태두라고 할 수 있는 G. E. Moore는 "Good" 혹은 "the Good"의 의미를 분석하니 32가지의 의미가 있음을 밝혔다. 하여간 '선'이나 '의' 개념을 정초 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이런 난제를 미리 파악한 칸트는 '선(善)'과 '의(義)'을 정의(definition)하는 일 대신 선과 의를 합리적으로 도출하는 규칙을 제공했다. 
그것이 바로 정언적 명제였다. 


필자의 스승인 장욱 교수님은 필자의 대학(한국외대) 시절 칸트의 도덕철학에 대한 비판을 하셨다. 칸트의 도덕철학, 윤리학이 형식주의라고 하면서 칸트의 규칙은 보편화 가능성만을 보여주고 실제로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런 이유에서 아이히만은 칸트의 규칙을 잘못 적용시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한 것이었다.      

도덕과 윤리가 어려운 것은 바로 힘든 상황에서 이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이다. 아이히만처럼 조직의 규칙에 충성인 사람들은 왕왕 의(義), 옳음을 조직 논리로 왜곡한다. 특히나 집단이기주의에 빠지면 사람들은 조직이 시키는 것 혹은 집단 내에서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것은 '무엇이든 나쁘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어떤 관료”라는 시에서 시인은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의 양심은 집단의 논리나 행정의 논리를 순응하지 않는다. 법과 제도가 나에게 나쁜 일을 시키면 아이히만처럼 이를 무조건 복종할 것이 아니라 반항해야 한다.

 

잘못된 법과 제도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고 거부할 수 있을 때 사회의 발전이 있다. 그러나 하루하루의 생계를 걱정하는 소시민들이나 혹은 출세를 최고로 삼는 지식층들에게 조직에서 이탈하기를 바라기는 불가능하다. 결국 자신의 생존과 밥그릇에 대한 보장이 없는 대부분의 경우 조직 이탈자가 되기를 바랄 수 없다. 단 신적인 존재에 의지해서 직장이나 조직이 아니라 그가 나를 먹여 살려준다는 믿음이 있다면 가능할 수도 있다.

이전 08화 사회적 거리두기의 시대, 철학  - 하이데거와 죽음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