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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재오 Apr 11. 2020

혼란의 시대, 다시 생각한 인간의 행복-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 철학 : 인간 활동의 최종 목적으로서의 행복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형이상학(Metaphysics)을 통해서 서양 철학 2000년을 지배했다. 근세에 올 때까지 서양의 철학은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논리학(Logic)에 대한 주석이고 또 발전이다. 후자의 경우는 중세의 스콜라철학을 지칭한다. 

     

형이상학 논리학, 자연학 등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이론적 학문(theoretical science)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시스템 중 쉬운 부분이 실천적 학문(practical science)라고 하는 윤리학이다. 이를 다룬 저서는『니코마코스 윤리학』이다. 사실 이 책은 거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평이하다. 그래도 철학 원전을 대하는 두려움이 있을까봐 약간의 주석을 붙여본다. 


 

요즘 우리 사회는 방향을 잃고 있다.


숱한 가학적인 아동 청소년 영상물이 게시된 n번방의 실체가 연일 매스컴에 보도되면서 우리 사회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과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끔찍한 사건이 매일 일어나고, 친척간 또는 이웃 간의 증오와 질투 그리고 분노 조절 장애로 인한 충동적인 살인과 폭력이 판을 치고 있다. 특히 최근(2020.3월)에는 'n번방 사건'이라고 불리는 미성년자들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동영상을 유포하는 사건으로 인해 온 국민의 분노가 들끓고 있다. 텔레그램 사이트를 이용한 미성년자 성학대를 촬영하고 이를 판매 유포한 인물은 조주빈이다. 그리고 이를 이용하고 또 스스로 공범이 된 가담자 또한 몇 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는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삶의 가치관과 도덕에 대한 무시와 타인의 인격에 대한 무지가 깔려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진정한 삶의 가치를 정립할 필요를 느낀다. 현대처럼 물질과 황금이 세상을 지배할 때 필연적으로 욕심으로 인한 폭력과 살인 등의 반사회적인 행위를 피할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행복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한번 공부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각자의 생활에서 행복의 가치를 찾아서
밝고 건전한 개인과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저서『니코마코스 윤리학』첫 구절은 “인간의 모든 활동과 탐구는 어떤 좋은 것(some good)을 지향한다”라는 것이다. “Every art and every inquiry, and similarly every action and pursuit, is thought to aim at some good.” 

     

여기서 좋은 것(good)을 흔히 가치(value)라고도 번역한다. 

따라서 선(善)=가치(value)=좋음(good)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따라서 선(좋은 것)이란 윤리적인 것만이 아니라 모든 가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윤리적인 가치와 기술적인 가치 혹은 금전적인 가치 모두를 포함한다.


수단적 가치와 본래적 가치


그런데 선(善) 혹은 가치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그 자체를 위하여 좋은 것이 있고 다른 것을 위해서 좋은 것이 있다. 달리 말해서 '본래적인 가치(intrinsic good)'가 있는가 하면 '수단적인 가치(instrumental good)'가 있다. 예를 들면 공부하는 목적은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고, 좋은 대학에 가는 목적은 좋은 직장을 구하는 것이고, 좋은 직장을 구하는 목적은 결혼도 하고 가정을 만들어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행복이 바로 본래적인 가치이며 최종적인 가치이고 '자기 충족적 가치(self-sufficient value)'이다. 이에 비해서 다른 가치 즉 좋은 성적, 좋은 대학 등은 모두 행복이라는 목표에 봉사는 수단적 가치이다. 


따라서 행복은 '어떤 최종적인 것이고 자기-충족적(=자족적)인 것이며 모든 행위의 끝(end)'이다. 이 끝(end)은 달리 말해 목표(goal) 혹은 목적이라고도 한다. 또한 행복은 최고선(最高善)이다. 


행복이 최고선이란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다소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들은 행복이란 어떤 즐거운 상태를 말하기 때문이다. 또 행복한 가정, 행복한 국가 등으로 행복이 형용사로 많이 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행복(eudaimonia)이란 'happiness'보다는 더 정확히 'living-well'로 번역된다. 즉, 행복은 잘 사는 것이다.

     

목적론(teleology)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 중 하나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인데, 이 책에서 그는 23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관련이 있는 행복 이론을 제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들 강의에서 답하고자 하는 핵심 질문은 "인간의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이다. 


이렇게 삶이나 혹은 우주에서 하나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고 설정하는 철학의 체계를 목적론(teleology)라고 한다. 목적론은 흔히 유신론(有神論)을 내포한다.


“우리의 모든 활동을 지시해야 할 목적이나 목표는 무엇인가?” 이런 거창한 질문에 앞서 현실적으로 어디에서나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사람들이 지식, 쾌락, 부, 그리고 명성(=인기)을 추구하는 것을 본다.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서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민중들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삶과 행동의 궁극적인 목표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또는 “왜 사는가?”라는 질문도 마찬가지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그 목적은 행복이요 잘 사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종교인들은 신적 소명(godly calling)을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대답도 행복과 불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적 소명을 다하는 삶이 바로 행복한 삶이기 때문이다. 


철학이나 모든 이론의 한계 


사람들은 보통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할 때 자신에게 주어진 어떤 특별한 사명 같은 것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특수 개별적인 맥락을 고려함이 없이 그냥 인간 일반 혹은 인간종(human species)의 보편적인 목적을 생각하고 있다.

철학이나 이론에서 개별적인 문제의 해결을 구할 수는 없다. 개체들의 사정은 무한히 다양하기 때문에 학문적인 해결을 구할 수 없다. 이런 영역은 종교 혹은 기독교에서 다룰 주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역시 개인들이 주어진 특수한 환경이나 역사 등의 고려 없이 일반적으로 인간종(human species)에게 맞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특수한 개별적 인간 역시 일반적 인간 집합에 속하기 때문에 학문적 인식이 필요하다.


욕구 다원론 vs 욕구 일원론 


사람들은 대부분 무엇이 최고선인지 생각해보지 못하고 그때 그때 살아간다. 그러나 제대로 사람들의 행동을 주의해서 살펴보면 사람들이 쾌락, 부, 그리고 좋은 명성을 추구한다는 말이 맞다는 걸 알 수 있다. 인간의 무의식 연구로 유명한 프로이드(S.Freud)같은 사람은 쾌락, 특히 성적 쾌락이 삶의 궁극적 에너지라고 밝혔으나 필자가 보기에는 그것도 하나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성적 만족 못지않게 사회적 인정을 추구한다. 따라서 사람의 무의식적 욕구(리비도)를 주장한 프로이드(Freud)보다 다층적 욕구의 발현을 주장한 매슬로우(Maslow)의 욕구 5단계설이 더 적절하다. 프로이드는 성욕(리비도)은 보통 억압되어 잠재적으로 존재한다고 하는데 명성이나 명예욕 또한 마찬가지다. 먹고사는 일이 너무 힘들면 명예욕 역시 억제될 수밖에 없다. 필자의 경우도 근래에 생활에 불만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나이와 학식에 맞는 명예가 없다는 것이었다. 최근 인터넷 글쓰기로 이것이 충족되니 남들과 충돌이 줄어들었다. 명성은 인기나 평가 등과도 같은 개념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이들(쾌락, 부, 명성 등) 각각은 어느 정도 가치가 있지만, 
그 어느 것도 인류가 지향해야 할 '최고선(the chief good)'의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다. 궁극적인 목적이 되려면, 행동은 자급자족하고 최종적이어야 하며,
그 자체로 항상 바람직하며(desirable) 결코 다른 어떤 것을 위한 것이 아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1097a30-34) 

     

그리고 '최종선(the final good)' 혹은 '최고선(the highest good)'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 의해 달성될 수 있어야 한다. 즉 그 명칭이 주는 거대한 느낌과는 달리 최고선은 평범한 인간의 삶 속에서 실천 가능해야 한다. 이는 최고선이 행복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여기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동의할 것이다.


물론 일제 시대나 유신 독재 시대처럼 어두운 시대에는 김구 선생처럼 “나의 소원은 첫째도 대한 독립이요, 둘째도 대한독립이요”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극적인 상황은 고려하지 않는다. 지극히 평범한 시대의 보편적인 인간들에게 묻는 것이다. 


사람들의 불행은 왕왕 최고선으로서의 행복을 그 하위 가치인 쾌락이나 돈 혹은 명예와 동일시함으로써 발생한다.


이를 보면 요즘 우리 사회의 온갖 부조리와 모순의 원인이 행복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생긴다고 할 수 있다. 즉, 돈이나 쾌락 자체를 행복과 동일시한 결과 “돈만 벌면 된다” 혹은 “돈이면 된다”는 황금만능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또한 과거 '땅콩 회항'사건에서 보여지는 재벌가 사람들의 안하무인적인 행위나 재벌 2~3세들의 마약 투입 사건에서도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혼동되어 있거나 아니면 병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덕(virtue)을 통한 행복의 달성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기능(function) 개념에 근거하여 행복을 논의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만 고유한 어떤 기능(function)이 있음을 밝힌다. 이 기능은 이성 기능이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밝힌 인간종의 본질적인 기능이다. 좋은 사람이란 인간의 고유기능인 이성을 잘 사용하는 사람이다. 이성 기능이 일반적인 인간의 기능이라면 실천과 행동에 있어서의 이성을 덕(virtue)이라고 한다. 덕 역시 기능적인 의미가 있음을 밝혔다. 덕(virtue)이란 탁월함(excellence)이다. 도덕적, 기능적 탁월함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좋은 사람 혹은 훌륭한 사람이란 덕의 원칙에 따라 사는 사람이다. 


덕은 또한 영혼의 기능이다. 사람이 덕의 원칙을 가지고 부단히 노력할 때 그 영혼은 유덕(有德)하게 된다. 이것이 행복한 경지이다. 유덕한 영혼은 최고의 선, 즉 행복을 구현한다. 이것이 완전한 생활이다. 행복은 잘 살고 잘하는 것이다. 행복은 총체적인 생활 가운데 이루어진다. 뒤에서 더 언급하겠지만 인간의 행복, 선(善) 혹은 덕(德)은 꾸준한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한 마리의 제비가 봄을 가져오지 못하고 또 (따뜻한) 하루가 봄을 가져오지 못하는 것처럼 하루나 혹은 짧은 시간이 사람을 축복되고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For one swallow does not make a summer, nor does one day; and so too one day, or a short time, does not make a man blessed and happy.


이런 의미에서 “아이들은 <철학적인 의미에서> 행복하지 못하다”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그 이유는 위에서 밝힌 것처럼 덕(virtue, excellence)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덕은 꾸준한 훈련과 실습을 통해서만 획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과 외적인 조건 


행복은 탁월함()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다"라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본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행복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덕(탁월함) 외에도 여러 가지 조건이 또한 필요하다고 한다. 친구도 필요하고 가정도 필요하며 자녀도 잘 되어야 한다. 물론 재물, 건강 심지어는 좋은 출생까지 필요하다. 출생은 아마도 당시 희랍(그리스)의 사회적 여건을 반영한 것이다. 즉, 노예로 태어난 사람이 탁월한 덕을 연마하거나 행복할 수는 없다. 


행복은 유덕한 영혼의 활동일 뿐 아니라 그 활동을 하기 위한 여건도 필요하다. 
이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외적 가치(external goods)라고 규정한다. 


행복이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서 좌우되는 면에서 어떤 사람들은 행복(happiness)을 행운(fortune)과 동일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이 관점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한다. 다른 관점은 행복을 덕(virtue)과 동일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후자의 입장을 취하지만 그는 외적인 가치도 행복의 조건에 포함시키기 때문에 절충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래서 그는 “행복은 신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다”라는 말도 한다. 덕의 연마는 학습, 훈련이나 체험에 의해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외부적 여건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은 절충적이다. 최고선으로서의 “행복”개념은 잘 정립이 되었지만 문제는 이를 달성하기 위한 조건이 ①주관적인 노력 ②객관적인 여건 둘 다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뒤에 오는 금욕주의 학파(스토아 철학)나 도덕을 위해서는 인간의 행복을 포기하라는  엄격주의(rigorism)와도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은 신적인 도움 내에서 인간이 최고의 탁월함을 연마, 실천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사상이다. 실은 이게 또한 필자의 관점이기도 하다. 

     

실천적인 덕론 – 중용(中庸) 


행복을 구성하는 핵심인자는 덕 또는 탁월함이다. 따라서 행복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덕(virtue) 또는 탁월함(arete)이란 무엇이며 또 탁월함에는 어떤 종류들이 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탁월함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지적인 탁월함이고, 다른 하나는 도덕적 탁월함이다. 

     

지적인 탁월함이란 유전과 교육을 통해 생겨나며,
도덕적인 탁월함은 실천과 습관에 의해 얻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실천학문의 특성을 알 수 있다. 윤리학의 목적은 '아는 것(knowing)'이 목적이 아니라 '하는 것(doing)'이 목적이라는 사실이다. 혹은 함(doing)을 통해 됨(becoming)을 이루는 것이 윤리학의 목적이다. 윤리(ethics)라는 희랍어 자체가 습관(habit)을 의미한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을 따르면 올바른 행동을 함으로써 올바른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꾸준한 덕의 실천을 통해서 유덕한 품성이 개발되고 또 거꾸로 유덕한 품성은 덕을 산출한다, 즉 유덕한 행동을 낳는다. 다소 역설적인 표현이기는 하나 이는 진실을 함축하고 있다. 왜냐하면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도덕적인지는 대부분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다음 중요한 것은 도덕적인 덕(moral virtue)은 타고난, 본성적인 것이 아니라 훈련과 습관을 통해서 길러진다는 사실이다. 


중력이 없다면 코끼리는 아래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본성적(by nature)란 '무거운 것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와 같이 아무런 노력 없이도 원래 그런 성질을 말한다. 이와는 달리 도덕적인 덕성은 타고난 그대로의 것이 아니라 본성을 연마하여 본래와는 달리 만들어야 비로소 가능하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덕성을 가능태(possibility)와 현실태(actuality)라는 그의 형이상학적 범주를 통해서 풀이한다. 태어날 때 인간의 도덕성은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후천적인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불완전한 도덕성이 극복이 될 때 비로소 도덕적인 덕(moral virtue)은 형성이 된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은 아무리 착하고 온순하게 보여도 도덕적이라 할 수 없고 또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윤리학은 올바른 습관을 키워주는 학문이다. 그리고 습관은 영혼에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좋은) 습관의 학문으로서의 윤리학은 인간의 영혼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인간의 영혼은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경향을 가진다. 예를 들어 방탕함(낭비)와 인색함 혹은 만용과 비겁함 등이다. 현대적으로 볼 때는 내향성과 외향성 등도 이런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인간의 영혼 혹은 마음 가운데 이런 두 가지 대립적인 특성들이 있다. 


이것이 이런바 아리스토텔레스의 덕론(theory of virtue)으로서 “덕은 양극단의 중용(mean)”이라는 것이다.


도덕적, 윤리적인 덕(德) 혹은 탁월함은 인간의 영혼이 중용의 원칙에 일치할 때 얻어진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위험에 직면했을 때 이 위험에 대하여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또는 그와 반대로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경우는 중용, 즉 용감함이라는 탁월함의 상태에 있지 않다. 용감이란 덕의 비겁함과 무모함의 중간이다. 다시 말해서 극단은 모두 악이란 것이고 극단적인 악을 피하여 양자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선이요, 덕이다. 


중용의 상태란 적절한 정도로 두려움을 갖고 있을 때이며, 바로 이때 우리는 그 사람을 ‘용감하다’라고 부른다. 이런 중용의 상태는 산술적 중간이라기보다는 기하학적 중간으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서 행위자가 누구냐에 따라, 시점에 따라, 상황에 따라 그 ‘중간지점’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용의 지점을 찾는 것은 어렵다.
이는 무슨 공식이나 획일적인 규칙으로 파악될 수 없다.


가령 불이 났을 때 소방수가 어떤 정도까지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지 파악하려면 많은 경험과 지식이 필요하다. 따라서 양극단을 피하고 중용점을 찾는 것은 어렵다. 이를 실천적인 지혜라고 한다. 실천적 지혜(phronesis)는 공동체에서의 올바른 공적 행동과 실천을 위해 꼭 필요한 지혜이다. 

     

명상적 지혜의 삶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천적인, 윤리적인 덕을 다루고 난 뒤 철학적, 명상적인 덕을 추가한다. 인간은 물질적인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고 그런 과정에서 사회적인 덕이 필요하다. 그것이 도덕적인 덕을 추구하는 삶이고 이를 행복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물질적, 도덕적 행복 외에도 인간의 이성은 존재와 우주를 통찰할 수 있다. 이때는 실천적인 덕이 아니라 명상적인 관조의 삶을 살 수 있다. 이는 물질적인 삶에 구애를 거의 받지 않고 거의 신적인 축복의 삶과 같다고 한다. 인간의 신체적, 물질적, 사회적 조건들과 무관한 철학자의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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