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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재오 Mar 14. 2020

서양철학의 기초, 파르메니데스 - '존재' 개념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의 형성의 근거

'헛된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부처 - 색즉시공, 보이는 모든 것이 다 헛된 것이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깨달음 중의 하나가 “헛되다”는 것이다. 혹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이다. 만물은 유전하고 인생은 헛되다.

성경의 전도서 1장 2절은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한다. 친한 친구가 갑자기 죽는다. 그리고 자식이 부모 먼저 가는 수가 왕왕 있다. 이때 우리는 인생무상(人生無常)을 절감한다. 불교(佛敎) 역시 그런 반성 위에 근거한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는 말이 있다. 물질계가 모두 헛되다는 것이다. 이를 깨달은 사람을 부처라고 한다.     

 

 왜 이렇게 헛된 것이 우리 인생일까? 이것이 바로 모든 철학의 단초일 수 있다. 철학의 단초는 쉽다. 누구나 인생적인 혹은 철학적인 의문을 가진다. 그러나 그 연구는 어렵다. 따라서 아무리 쉽게 철학을 설명해도 한계에 부딪힐 수 있다. 여기서 다루는 부분은 쉽지 않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서양 철학의 기초를 내 것으로 할 수 없다.

 

따라서 “불가능은 불가능하다, The impossible is impossible!”
이런 믿음으로 철학의 여행을 떠나보자.




 위의 불교적인 혹은 인생론적인 헛됨의 문제를 서양 철학 역시 태초부터 직면하고 이를 탐구해왔다. 그러나 출발점은 비슷하지만 그 방법이나 도달한 결론은 불교와 극히 다른 것이 서양 철학이다.

 서양 철학은 이런 문제를 변화와 생성의 문제로 규정했다. 즉, 삶이 죽음이 되고 또 죽음에서 삶이 발생하는 문제를 단순히 변화(change)의 문제로 본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이런 헛된 세상을 불교와 마찬가지로 가상(假想)이고 환상(幻想)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머물지 않고 인간 인식의 방법을 분석하여 다른 해결책을 제시한다.

 

'아테네 학당'의 파르메니데스 - 라파엘로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의 형성의 근거가 된 것은 그의 선배 파르메니데스라는 사람의 “존재” 개념이다. 서양 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존재 개념이다. 현대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M.Heidegger)도 존재(存在) 혹은 실존(實存)의 개념을 가지고 자신의 철학의 탑을 쌓았다.

참고로 존재와 실존은 서로 뗄 수 없는 개념이다. 서양 철학의 기본은 존재론(ontology) 혹은 형이상학(metaphysics)이다. 그런데 플라톤에 앞서 서양의 존재론과 형이상학을 기초한 사람이 바로 파르메니데스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유명한 명제는 “존재는 존재한다(Being ist)"


혹은 “있음은 있다”이다. 당연한 말인 듯이 보이는 이 문장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일견 동어반복(同語反覆)적으로(tautology) 보이는 이 문장은 실은 변화와 생성을 부정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A=A와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일견 당연하게 보이지만 양자는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다. 이를 간과하는 학자들이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의 존재론을 가볍게 보는 수가 있기는 하나, 이들은 양자 간의 존재론적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세한 논증은 필자의 저서<논리의 탄생>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파르메니데스의 “있음은 있다”에서 도리어 논리학의 동일률(同一律), 즉 A=A 가 파생되었다. 이 설명은 다음에 다룰 것이다.

“있음은 있다”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없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있는 것은 없어질 수가 없고, 따라서 그것은 영원히 있는 것이다. 혹은 존재자의 속성은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자는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이는 달리 말해서 '있음' 혹은 '있는 것'은 자기 동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있음 혹은 유(有) 개념의 분석을 통해서 드디어 “있음은 있다”라는 철학 최대, 최고의 간결한 진리에 도달한 것이다. 단 한 문장으로 그는 서양 철학 혹은 모든 철학의 출발을 그 기반으로부터 뒤엎고, 신선하고 진실된 토대를 닦은 것이다.  

귀여운 아이와 웃고 있는 노인

 이것을 달리 말하면 변화와 생성 그리고 소멸 등의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있다. 자연계와 인간계는 모두 변하고 생성, 발전, 소멸한다. 파르메니데스는 이런 경험적인 사실을 신박하게 부정한 것이다. 왜냐하면 변화, 생성, 소멸, 발전 등은 모두 그 논리 구조 상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되고 혹은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되는” 그런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한 아기가 태어났다” 혹은 “나의 어머니는 죽었다”라는 사실 역시 철학적, 논리적으로는 모순이라는 것이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이다. 상당히 경악스러운 주장이다.

 

철학은 이처럼 때때로 상식과 경험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다. 그런 철학이 궤변이라고 철학을 비판하고 욕한다고 해도 할 수 없다. 그 역시 그 사람의 자유이다. 그럴 수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파르메니데스에 의하면 '참다운 존재(being)는 감각, 지각되는(perceive) 것이 아니라 사유되는(=생각되어지는) 것이다.'라고 한다. 즉, 눈에 보이는 것, 경험되어지는 것은 참다운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가상(假想)이고 환상(幻想)이라는 것이 서양 최대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이다. 여기서 서양 철학의 가장 본질적인 사상이 정립된다. 즉, '감성으로 아는 것은 신뢰할 수 없고 이성으로 파악된 것만이 진리이다.'라는 사상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존재와 사유는 동일하다"라고 했다.


일장춘몽(一場春夢) : 한바탕의 봄 꿈이라는 뜻으로, 인생의 부귀영화가 덧없이 사라짐을 비유하는 말

 그는 감각되는 것(=보이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설령 그것이 집이나 거리 혹은 부모나 자식 같은 우리의 중요한 삶의 일부라도 그렇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런 현실의 존재들이 변화하고 생성, 소멸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생 일장춘몽(一場春夢) 혹은 인생무상(人生無常) 등이 파르메니데스의 사유와 유사하다. 그러나 불교와 파르메니데스 차이점은 양자 모두 "보이는 세상", “감각적인 것”(the sensible)을 철저히 부정하지만 후자는 “사유되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것” 혹은 “이성적으로 파악되는 것(the intelligible)은 있다”라고 본 점이다. 즉 있음은 감각이 아니라 이성과 사유에 의해서 알려진다. 그런 의미에서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것은 있다”라는 명제를 남긴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생성, 변화, 소멸되는 세상 즉, 우리의 현실 세계를 부정했다. 왜냐하면 논리적으로 볼 때, 있음 혹은 유(有)의 본성은 문자 그대로 “있는 것”이다. 있음은 오직 사유를 통해서 접근된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생성, 변화, 소멸하는 세계=이를 철학에서는 현상(現象, phenomenon)이라고 한다.


철학자의 길, 종교의 길


 그 반면 “참다운 존재는 있다” 혹은 “영원(永遠) 불변적(不變的)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기독교의 경우는 이는 신(神)과 같은 존재이다. 이 점에서 파르메니데스의 존재(Being) 개념은 성경 창세기 3장 13절의 예화 즉,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 하나님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한 것과 유사하다.  하여간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개념은 스스로 혼자 계신 하나님의 존재와 비슷하다. 단, 차이는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는 권능이나 인격 혹은 창조 같은 속성은 없다.

 그리고 그 존재 혹은 유일자를 아는 방법은 전자는 사유를 통해서이고 후자는 믿음이나 성경을 통해서이다. 전자는 철학의 길이고, 후자는 종교의 길이다. 여기서 서양 철학의 위대한 전통이 수립이 되는데 그것은 감각이 아니라 (올바른) 사유를 통해서 진리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 및 후대 철학의 발전에서 본 파르메니데스 철학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참다운 존재는 불변적이다.

참다운 존재는 감성이 라기보다는 이성과 사유를 통해서 파악된다.

이 참다운 존재는 나중에 개념, 법칙,정의(definition)혹은 원리(principle)로 불리어진다.


서양 철학 내지 학문의 2대 본질을 형성한 것이다. 이 두 가지는 현대까지 적용이 되고, 앞으로도 유지될 영원한 학문과 과학 그리고 철학의 진리이다. 그리고 “있음은 있다”, “존재와 사유는 동일하다”라는 파르메니데스의 2대 명제는 그 후 데모크리투스 등의 “다원론”, “원자론”을 만들고 특히 플라톤의 “정신적-관념적 실재론” 철학을 산출시키는 실마리가 되었다.

 앞선 글에서도 언급한 바 플라톤이 그의 대저 <국가>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데아 개념을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개념을 통해서 정립한 덕분이었다.  또한 그 때문에 플라톤의 이데아설이 무너지는 아이러니칼한 결과를 초래한다. 이를 실행한 자는 바로 플라톤의 수석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결론적으로 모두 헛되게 보이는 세계와 삶에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것이 파르메니데스의 간결한 존재론의 결론이다. 모든 것이 변하고 부패하고 생성, 소멸  하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 즉 영원한 것 불편적인 것도 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개념 혹은 그 후에 정립되는 법칙(law)개념, 정의(definition)개념, 원리(principle)개념 등이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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