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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재오 Mar 18. 2020

플라톤의 철인왕(Philosopher King) 사상

위기에 처한 공동체를 구하기 위한 철학의 지혜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지난 강의에서 우리는 플라톤의 <국가>편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를 중심으로 이데아설을 살펴보았다. 필자는 플라톤이 <국가>를 쓸 수 있었던 이유가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개념을 도입한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그 이유로,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무지(無知)의 지(知)를 주장한 바 있었다. 그리고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을 보면 주로 덕(德)에 대한 이야기가 주로 나온다. 그러다가 <국가>에서 갑자기 이데아설을 중심으로 국가의 조직이나 윤리 혹은 통치 그리고 교육에 대한 이야기가 체계적으로 전개되어 나온다. 


지금 아테네 시장의 모습

플라톤의 주된 관심은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하면 국가 공동체-당시 그리스의 작은 도시국가인 폴리스-를 다시 재건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였다. 소크라테스는 우선 인간의 행동과 윤리 문제를 천착했다. 이것은 “덕(德)이란 무엇인가?” 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당시 아테네는 현재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가 활발했었다.


하나의 사회적 현상은 소피스트(sophist)라는 지식의 상인 혹은 선생들이
'어떻게 하면 출세를 할 수 있을까'하는 방법을 서비스 판매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러나 직업적인 기술 외에도 가치의 상대주의를 주장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프로타고라스라는 당대 최고의 소피스트(궤변론자)는 “인간(개인)이 만물의 척도다”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은 나의 관심이나 이해가 가치의 기준 즉, 올바름이라는 뜻이었다. 쉽게 말하면 “내가 하는 것은 다 옳다”는 식의 논리를 가르치고 팔고 있었다. 이런 논리는 특히 재판정에서 응용되었다. 자신의 고객이 무조건 옳다고 주장하는 변호사의 논리와 같다. 무조건 재판에서 이겨야 살아남는다고 하는 변호사들의 생리를 보면 소피스트들의 논리가 이해가 된다. 

정의의 여신상

 당시의 어떤 유명한 소피스트(sophist)는 자기에게 변론술을 배운 사람은 절대로 재판에서 지지 않는다고 과장광고를 했다. 그리고 만약 졸업생이 재판에서 진다면 수업료를 다 환불해 준다고도 했다. 또, 어떤 소피스트는 정의(正義) 개념을 왜곡하여 정의란 강한 사람들이 스스로의 이익을 취하는 사회제도(정의는 강자의 이익)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우리한테 유리한 게임의 규칙이 정의로운 규칙”이라는 것이다. 

이는 공정이나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지식의 상인 소피스트들은 공공연히 이런 주장을 했다. 이와 같이 소피스트들은  상대주의 가치관을 공공연히 부르짖어 당시 사회를 더욱 혼란하게 하는 면이 있었다. 이와 같은 소피스트들의 잘난 체하는 상대주의를 부수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역할이다. 이는 다음에 다시 다루겠다.      


 플라톤 역시 이런 맥락에서 가치 개념을 정립하려고 했다. 


그러나 소피스트들에게 밀리지 않으려면 가치의 객관성을 입증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현대까지도 가치 개념의 정초(定礎)는 아주 힘들다. 이런 일을 현대 철학에서는 “자연주의의 오류(Naturalistic Fallacy)”라고 한다.      

플라톤의 <국가> 편의 구성을 보면 1장부터 5장까지는 국가 공동체의 구성과 직업 등을 다룬다. 

국가는 아래 보이는 것처럼 계층이 3등분 된다.

지배계층(수호자들) 

생산 계층(농, 공, 상) 

군사 행정을 맡아보는 계층 

그리고 각 계층은 각각 ① 정욕의 절제 ② 기개 있는 용기 ③ 선의 이데아를 인식한 지혜를 그 계급의 덕목으로 가지고 있다. 이 세 가지 계급과 덕성들이 서로 균형을 이루는 것이 정의(正義, justice)이다. 

정의, 지혜, 절제 그리고 용기가 플라톤의 4가지 주요한 덕,
4주덕(主德)이라고 불리어진다.      


철학자 왕 혹은 철인(哲人) 왕 사상


그런데 여기서 플라톤은 지배계층(수호자라고도 함)이 철학을 알아야 한다고 다소 생뚱맞은 주장을 한다. 이른바 철학자 왕 혹은 철인(哲人) 왕 사상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철학자란 이데아 사상을 가지고 있는 자이다. 작중 화자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 철학자들은 생성(生成)과 소멸에 의해 동요되지 않고, 언제나 확고한 실재(reality)를 제시해줄 만한 학문에 대해서 적극적인 열의를 가지고 있다” 
(중략)
“그리고 그들은 모든 실재(reality)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김민홍 역, 플라톤 전집 1권 <국가>p. 238)

여기서 철학자는 바로 이데아의 학문을 아는 자들이다. 이데아의 속성은 파르메니데스의 존재(Being)와 같다. 생성과 소멸 등 현상계(現象界) 밖에 있는, 굳이 말하면 예지계(睿智界)에 존재하는 “이데아” 혹은 “존재”를 아는 자가 바로 철학자이다. 이런 사람은 세속적인 욕구나 이기적인 탐욕에 빠질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최고의 존재, 즉 선(善)의 이데아나 미(美)의 이데아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치자는 마땅히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는 지도층들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재난을 벗어날 수 없다.


또한 지배자는 애국심이 있어야 한다. 

플라톤은 말한다.
“지배자가 될 사람은, 여러 가지 쾌락이나 고통 속에서
연마된 애국자들이라는 것이 입증되어야 하네” 

이 부분은 한국의 현실을 보면 잘 이해가 될 수 있다. 당리당략만으로 집권하는 정당이나 그 통치자들의 잘못으로 인해 국민들은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했던가? 현재 코로나 감염병의 확산이라는 큰 재난은 모두 지도자들의 집단이기주의와 사리사욕을 위한 정책 때문에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전염병으로 죽어야 했다.      


플라톤

그래서 플라톤은 철학자들이 나라를 통치하기 전에는 국가는 재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라고 한다. 즉, 무사(無私) 무욕(無慾)으로 오직 국가와 국민을 위한 통치자가 나와야 한다. 물론 민주적인 방식으로 선출되어야 하는 전제 하에서이다. 물론 이데아 지식이 과연 그런 기능이 있는지는 의문이 있다. 어쨌든, 플라톤에 의하면 이데아의 지식이 있는 사람(철학자)은 다음과 같다.


 “조용히 자기 일에 충실하며 폭풍우가 불 때에도 그것을 피해 바람벽 밑에 서있는 사람처럼, 그는 불법을 자행하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자기 자신은 부정이나 불법에 물들지 않고 살아가다가, 이 세상 떠날 때, 아름다운 소망을 갖고 명랑한 마음으로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게 여길 것이다” (같은 책 p.254)      


그런데 한 가지 모순은 이런 고상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도
반드시 국가의 쓰임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국가의 부름을 받아야 한다. 요즘 같으면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든지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국가나 국민들이 그를 뽑아야 한다. 그럴 경우 “국가의 제도가 그에게 적당하면 그는 더욱 크게 성장하여 그 나라의 구세주”가 될 것이다. 


모든 덕, 즉 지혜, 절제, 용기 그리고 정의 등을 갖추고 이데아 지식까지 겸비한 철학가는 설령 현실에서는 소외되고 대접을 못 받을 수 있지만 그는 노년에는 휴식과 위안을 누리고 죽은 후에 저 세상에 가서 자기가 살아온 생애에 알맞은 운명을 타고날 것이다. 즉 철학을 사랑한 자는 사후의 축복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플라톤이 당시 그의 조국의 혼란상을 보고 철학을 통해서 국가 구원의 꿈을 꾸었다는 것을 말한다. 비록 그의 시대에 그는 정치개혁, 국가 개혁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그의 <국가> 편을 통해서 후대에 영원한 교육과 철학의 교훈을 주었다는 데 깊은 의의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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