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은 학습자가 자신의 창조적인 생각을 낳게 하는 산파와 같은 기술이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철학을 다 말하기란 쉽지가 않다. 여기서는 주로 그의 교육학적, 철학적 방법론인 산파술의 문제만을 간략히 고찰해 보기로 하자. 소크라테스는 그의 제자인 플라톤의 진술에 의하면 당시 가장 지혜롭고 올바른 사람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올바른 삶의 방식과 덕과 지혜 그리고 영혼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당시 그리스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꽃피우던 시대였다. 그러나 동시에 민주주의의 약점인 대중선동과 인기영합주의(populism)등이 판을 치던 시대였고 중우정치(衆愚政治), 금권정치(plutocracy), 전제정치 혹은 참주정치(tyranny) 등으로 말미암아 도리어 민주주의는 쇠퇴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moral corruption)”와 “종교적인 불경(impiety)”의 죄명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독배를 마셨다.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우매한 민중들에 의해 순교한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철학자가 된 것이다.
가장 훌륭한 정치 형태라고 할 수 있는 민주주의도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타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철학이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아테네는 결국 B.C.338년 마케도니아의 침략을 받아 망하고 말았다.
이런 상태에서 활약한 플라톤은 선동 정치가들과 그를 사상적으로 기초한 사상가들을 비판했다. 선동 정치 혹은 마키아벨리적인 권력 지상주의에 이론을 공급해 준 이들이 당시 소피스트(Sophist), 혹은 궤변론자들이라고 불리던 일종의 사상가 혹은 철학자들이었다. 이들의 사상도 꽤나 중요하고 또 풍부하지만 여기서는 아주 간단히 다루기로 한다.
간단히 말해서 소피스트(Sophist)들은 상대 주의자(Relativist)들이었다.
그들은 정의(正義)나 선(善) 등의 객관적인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도덕과 법을 자신들의 이해의 관점에서 해석을 했다. 다시 말해서 소피스트들은 가치 개념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살짝 의미만 바꾼 것이었다. 너와 나 모두에게 타당한 객관적인 정의(正義)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투는 두 사람 중 목소리 큰 사람이 말하는 것이 정의라는 식이었다. 살인자가 사람을 죽여도 법정에서 이기기만 하면 그는 죄가 없다 는 식이었다.
따라서 그 당시 중요한 것은 옳고(right) 그름(wrong), 선과 악, 정의와 불의의 기준을 세우는 것이었다.
이것이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 플라톤이 일생에 걸쳐 추구한 사명이었다.
즉, 윤리적인 가치의 기준을 확립하여 공동체의 타락을 막고
인민들의 복지를 가져오는 것이 그들의 이상(理想)이었다.
이 안타까운 상황을 우리는 지금의 현실에서도 마주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정치집단이 주변국들의 눈치를 살피며 제대로 된 행동에 나서지 못한다는 점과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등의 가치가 잠식당할 수 있기에 필자는 무척 우려스럽다. 그리고 대통령 민정수석 조 씨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자녀들의 장학금 특혜, 입시부정을 저지르고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의 수사를 받아도 “조 씨 수호”를 외치는 무리들과 이를 온갖 궤변으로 옹호하는 편향된 언론인들 혹은 네티즌들이 바로 현대의 소피스트들이다.
이는 현 정치인들이 권력을 쟁취하는 데는 능하지만 권력을 유지하기에는 무능함을 보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감염병 차단을 못하여 현재 우리나라는 코로나 19 역병(疫病)의 창궐로 나라가 황폐화되어가고 있어 씁쓸한 심정이다.
이런 중요한 시대적, 실천적 사명을 수행하면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철학적, 방법론적 개념을 정립했다고 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①귀납적 추리(inductive arguments)와 ②보편적 정의(universal definition)이다.
①귀납 또는 귀납적 추리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개별자(particular)에서 보편자(universal)를 추리하는 논리적 과정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개별자들의 공통성을 찾아서 그 공통성을 보편적인 본질로 설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훌륭한 항해사가 그 방면의 전문가이고, 또 훌륭한 운전사 역시 그 방면의 전문가이라면 우리는 "훌륭한 사람은 전문가이다"라고 일반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혹은 오리 A가 검은색이고 오리 B도 검은색이고 (…) 오리 Z도 검은색이면 “모든 오리는 검다”라고 추론하는 것이다.
오늘날 이런 귀납추리는 과학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볼 수는 없지만 상식적, 경험적인 판단에는 많이 활용되고 있다. 우리 속담에 "하나를 보면 둘을 안다" 혹은 “자라보고 놀란 놈이 솥뚜껑보고 놀란다”라는 것들이 있는데 이 역시 귀납법을 암시하는 것이다.
②이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철학사적으로 최초로 정의(定義, definition), 혹은 '보편적 정의(universal definition)'라는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 보편적 정의라는 문제를 가지고 당시의 지혜롭다고 자처하던 사람들의 무지를 폭로하였다.
오늘날처럼 당시도 실력이 최고의 가치로 인정을 받았다. 실력을 당시 희랍(그리스) 사람들은 덕(virtue)라고 표현했다. 특히 소피스트들은 실력이 있는 자들 혹은 덕이 있는 자들이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덕(德)과는 다른 개념이지만 번역을 그렇게 하였다. 즉, virtue를 그냥 “실력” 혹은 “능력”으로 번역했더라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당시 시대는 한마디로 실력 있는 자들의 세상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실력과 능력 개념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잘한다”를 의미하니 큰 문제였다. 요즘도 그렇긴 하다.
권력과 금권 그리고 집단이기주의, 대중영합주의(populism)등으로 오염된 아테네 민주주의 사회에서 더 큰 문제는 젊은이들마저 기성 정치권에 물들어 선악(善惡)⦁정사(正邪)를 구분하지 못하고 잘못된 기성 정치 지도자들을 맹종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양 역사 통틀어 최고의 현자(賢者)라고 불리어진 소크라테스가 진리를 설파하고 젊은이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고 또 그들로 하여금 창조적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플라톤이 쓴 책들은 모두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 <테아이테토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과 담소하고 술도 마시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예를 들면 그가 사람들에게 "덕(德)이 무엇이냐?"라고 물어보면 사람들은 그에게 '나라를 다스리거나 유용하다거나 현명한 것이 덕(德)이다'라고 답한다. 여기서 덕(virtue)이란 도덕적인 것뿐 아니라 기술적, 실용적인 탁월성도 포함한다. 당시의 덕(德)은 오늘날의 훌륭함과 같은 말이다.
당시의 잘난 체하는 사람들은 모두 “나는 덕(德)이 있다”라고 자랑을 하고 다녔다. 덕이 있다고 하는 것이 일종의 광고와 같은 것이었다. 가령 덕이 있는 웅변가는 대중 선동에 능하여 그를 통해서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었다. 어떻게든 속여서, 중상비방을 하더라도 상대방을 거꾸러뜨릴 수 있다면 잘했다고 하는 것이 아테네의 덕 있는 자들이었다. 이때 덕은 차라리 권모술수와 같은 개념이었다.
그렇게 잘난 체 자신의 덕을 자랑하는 소피스트 및 당시의 지도자들에게 소크라테스는 당신이 말하는 덕의 뜻이 무엇인지 묻는다. 덕의 정의(definition)를 묻는 것이다. 그들은 각자 자기 방식으로 덕이 무엇인지를 말한다.
그러면 소크라테스의 반문은 '그것은 덕(德)에 관한 보기, 즉 하나하나의 덕을 나열한데 지나지 않고, 덕(德) 그 자체는 아니다'라고 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소크라테스가 구체적인, 개별적인 사례(instance, example)와 보편적 개념(universal concept) 혹은 보편적 정의(universal definition)'를 구분했다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가 상식으로 구분하는 보편과 특수 혹은 본질과 현상 등의 범주는 소크라테스에 기인한다. 소크라테스가 추구한 덕(德) 그 자체 혹은 덕(德)의 정의를 실체화, 형이상학화한 것이 바로 플라톤의 이데아이다.
이런 보편자 문제와 더불어 소크라테스는 산파술(産婆術)을 자신의 교육철학적 원리로 내세운다. 이는 본 필자의 견해에 따르면 서양의 교육과 철학의 중요한 개념이다. 이는 중요한 문제이니 만큼 플라톤의 대화 <테아이테토스>에서 직접 인용한다.
"나는 산파의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신이 정해 놓은 걸세. 그리고 낳는 일은 하지 못하도록 막아 버렸네. 그러므로 실제로 나 자신은 전혀 지혜가 있는 사람이 못되며, 또 나로서는 자기 자신의 정신에서 그런 지혜의 발견은 전혀 볼 수 없네. 그러나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이나 나와 교제를 하는 사람은, 처음에는 전혀 무지하게 보는 사람이 없지 않지만, 누구나 이 교제가 깊어짐에 따라, 만일 신이 용납하기만 하면 그 사람 자신이 보기에도 그리고 다른 사람의 생각에도, 놀라울 만큼 진보하게 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일이네. 그런데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나에게서 그들이 배워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여러 가지 훌륭한 것을 출산하는 것일세" - <테아이테토스>
이 대목에서 필자는 서양의 교육 방법론, 학습론의 뿌리를 인식한다. 우리는 '배운다', '공부한다'라고 할 때, 흔히 독서나 주입식 수업 혹은 암기를 통한 지식의 습득을 말한다. '공부를 잘한다'함은 주어진 내용이나 교과서를 이해하고 시험을 잘 본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결국 순응 내지 적응을 잘한다는 것이다. 이런 풍조는 성현의 말씀이나 경전을 무조건 옳다고 보고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전근대적 학습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러나 위의 소크라테스의 교육론, 학습론 그리고 진리론은 그렇지 않다. 교사는 진리나 지식을 전달하고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학생 스스로 진리와 지식을 산출하게끔 도와주는 자에 불과하다. 소크라테스는 자기를 "남자를 위하여 산파 역할을 하는 것이며" 또 육체의 해산이 아니라 "정신의 해산을 돌보는" 역할로 생각한다. 인류의 영원한 교사 소크라테스 자신은 (진리와 지식이라는) 아기를 낳지 못하도록, 즉 불임으로 규정된다.
이는 교사나 학원 강사가 지식을 팔고 학생은 지식을 사는 한국의 지식 전달과는 많이 다른 것이다. 결국 소크라테스의 교육법은 일정한 주제를 두고 문답하고 거기서 대화자들이 스승의 생각을 듣고 이를 스스로 소화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의 고유한 사상과 창조의 세계를 찾아간다는 대화식 산파술(maiutic)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