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와 찡찡이
사 년 전 지금의 동네로 이사를 오고 이 골목의 마스코트 격인 길고양이 '왕자'를 만났다. 통통한 몸매에 치즈 코트를 입은 수컷답게 우리 집 고양이들보다 머리가 큰 것은 물론이고 덩치도 꽤 컸다. 4킬로 그램 초반대 몸무게를 가지고 있는 우리 집 고양이들보다 위로 두 체급 정도로 가늠할 수 있을 만큼 우람한 고양이였다.
왕자의 외모 중 특이점이 하나 있었는데 눈 한쪽이 불편한지 매일 같이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불편한 쪽 눈 모양은 반달 곡선이 일그러진 모양으로 눈을 바로 뜨지 못하는 듯했다. 그 점을 제외하고 왕자는 전반적으로 건강해 보였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경계하지 않고 넉넉히 손길을 허락해 주었다. 가끔 왕자가 좋아하는 츄르나 간식을 주면 내 바지에 머리를 갖다 대고 냄새를 묻히거나 벌러덩 눕는 애교도 보여주는 귀염둥이였다. 큰 덩치와 달리 스위트하고, 누구보다 관심과 사랑받기를 즐기는 대문자 E 고양이.
요즘말로 '인싸' 기질이 다분한 귀염둥이 수컷 고양이.
'왕자'라는 이름은 동네에서 나와 동생 둘이서만 부르는 이름이었는데, 첫 번째는 예쁘지 않은 고양이라서, 두뻔째는 주인에게 버림받고 길고양이가 되어버린 그 아이의 사정이 너무나 가슴 아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고생이라고는 모를 것 같은 귀티 나는 이름을 지어 주고 싶어서 '왕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왕자가 동네 사람들에게 호의적인 이유는 어릴 때부터 사람이 키워서 그렇다는 말이 있었다. 통장 아주머니 말에 의하면, 오륙 년 전쯤 이 동네 빌라에서 살던 젊은 사람이 이사를 가면서 왕자를 버리고 갔다고 했다. 그런 왕자를 안쓰럽게 여기던 모 빌라 주민들의 도움으로 왕자는 빌라 입구 한편에 잠자리, 밥자리를 제공받게 되었다. 물론, 이 빌라 주민 전체가 왕자를 반기는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나마 한 두 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자가 이 빌라에서 자리를 얻어 살 수 있게 된 것은 '시끄럽게 하지 않는다'였다고. 그러고 보니 왕자는 도통 "야옹" 소리 한 번을 내지 않는 과묵한 고양이었다.
밥자리가 없는 길고양이들에 비하면 왕자는 신세가 꽤나 좋은 편이었다. 특히나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되는 계절부터 초가을까지 빌라의 앉은 담 기둥 위에 올라앉아 뒹굴거리는 왕자의 통통한 귀여움은 찡그린 한쪽눈의 단점을 상쇄할 만큼 오가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왕자를 향해 부지런히 휴대폰으로 사진을 담았고, 아장거리며 걷는 아기들도 왕자를 보고 신기해했다. 왕자로 인해 삼삼오오 모인 동네 사람들로 인해 빌라 앞은 흡사 '미니 동물원'같았다.
그런 관심들 속에서 행복한 듯 여유를 부리는 왕자를 보고 있다가, 가을로 접어들어 왕자가 바깥출입을 할 수 없는 추운 겨울이 시작되면 - 겨울에는 추운 왕자를 위해 빌라 주민 한 분이 겨울 한시적으로 왕자의 거처를 본인 집에서 거두어 주셨다- 그렇게 쓸쓸해 보일 수가 없었다.
추운 겨울날 바쁜 걸음걸이로 골목을 오가는 발걸음을 쫓는 왕자의 눈길이 처량해 보일 뿐이었다. 맑고 따스한 계절에는 그 계절이 그러한 것처럼 따스함을 보여주던 사람들이, 추운 겨울이 되자 왕자에게 보인 관심과 호의도 차갑게 식어버렸다. 가졌던 것을 도로 빼앗긴 사람의 모습처럼 낮은 담 기둥 위에서 사람들을 기다리던 겨울의 왕자는 대개 쓸쓸하고 실망스러워 보였다. 좋은 가족을 만났더라면 왕자가 그렇게도 바라던 관심을 듬북 받으며 아픈 눈 치료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늘 따라다녔다.
잠자고 먹을 수 있는 빌라 입구 한편에 왕자의 자리가 있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길고양이라 왕자 역시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꼬질이였다. 절기상으로는 가을이라고 해도 일교차가 심해지는 가을부터 빌라 입구에 있던 왕자는 촘촘한 털 속을 뚫고 들어오는 한기를 일찍이 경험했을 것이다. 왕자의 눈물도 가을부터 심해지기 시작해서 겨울에는 더욱 심하게 눈물을 흘리고 다녔다. 다행히 빌라 주민 몇몇 분들이 연고도 사서 발라주고 사료도 사서 밥그릇도 채워주는 등 열심히 돌보아 주셨지만, 고양이를 키워보신 분들이 아니기도 하고 왕자를 병원에 데려갈 생활적인 여유가 없는 분들 같았다.
나는 한 때 왕자의 한쪽 눈을 고쳐주기 위해 몇 군데의 병원도 알아봤었다. 왕자의 사진을 본 경험 많은 수의사 선생님의 말로는 눈썹이 눈을 찔러 사람으로 치면 쌍꺼풀 수술을 해서 눈썹이 더 이상 눈을 찌르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있다고 했다. 가장 정확한 것은 고양이를 포획해서 병원에 데려가야 진단을 할 수 있었으나, 왕자를 포획하는 할 자신이 없었다. 중성화 수술을 해(당해) 본 경험이 있는 왕자는 특히나 포획틀만 보면 심하게 경계를 했었는데, 더군다나 며칠 전 왕자의 친구인 찡찡이가 내가 놓은 포획틀에 갇힌 것을 제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찡찡이는 몸집이 왜소하고 마른 삼색이 암컷 고양이로 왕자의 이웃사촌이다. 나이는 왕자가 대략 8살쯤 되었다고 추정하면, 찡찡이는 겨우 한 살이 조금 안 된 신입 고양이었다. 찡찡이는 왕자가 살고 있는 빌라 앞에서 왕자가 나올 때까지 "야옹, 야옹" 하고 하도 울어대서 동네 사람들이 그 아이를 찡찡이라고 불렀다. 어미가 낳아 기르다 독립을 시켰지만 어릴 적 어미젖을 떼고 왕자의 사료를 얻어먹던 정이 붙어서 그런지 제 어미보다 왕자를 더 의지하는 듯했다. 왕자가 살고 있는 빌라 유리문이 닫혀 있기라도 하는 날에는 왕자가 나올 때까지 동네가 떠나가라 울어댔으니 찡찡이를 좋아하는 동네 주민들이 없었다.
더군다나 중성화를 할 시기도 다가오고 있어 겨울 내내 찡찡이를 지켜보다 봄이 오면 사비를 털어서라도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발정이라도 나서 더욱 날 선 소리로 앙칼지게 울어대다가는 미운털이 제대로 박힐 것만 같아서 고양이용 통덫을 빌려 포획을 했던 것이었다.
여러 번의 시도와 일주일의 대기로 인해 피로감은 있었지만, 다행히 찡찡이를 포획해 병원으로 옮길 수 있었다. 포획틀에 갇힌 찡찡이가 불안한지 왕자를 보고 울어대자 왕자는 포획틀로 다가와 냄새를 킁킁 맡더니 앞발로 포획틀 입구를 긁어댔다. 그렇게라도 하면 열릴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왕자는 포획틀에 갇힌 찡찡이를 안심시키려고 하는 듯이 택시가 올 때까지 곁에 있어주었다. 이렇듯 인정 많고 따뜻한 왕자를 보고 있자니 '사람보다 낫구나'하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