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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몬 롤 May 15. 2024

왕자가 그립다 2

 왕자가 자기 친구 찡찡이를 포획해 병원으로 데려간 나를 오해해 피하지는 않을까 조금 걱정했지만, 중성화 수술을 잘 마친 친구가 다시 돌아오자 나를 경계하지는 않았다. 왕자는 포획틀에서 나온 찡찡이의 냄새를 맡기 위해 얼굴을 들이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고, 이윽고 둘은 서로의 얼굴에 코를 가까이 대고 익숙한 냄새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동안 찡찡이를 걱정이라도 했다는 듯 포획틀을 내려놓자마자 쪼르르 달려온 왕자는 이 골목 최고의 인기쟁이기도 하지만 은근한 따스함이 있는 의리의 고양이기도 하다. 싸움을 못하는 것만 빼면 최고의 고양이가 아닐까.


물주먹 왕자님

수컷 고양이들은 새벽에도 영역 다툼으로 거칠게 싸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상대를 향해 날카로운 소리로 으름장을 놓다가 상대가 자신의 구역에서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둘이 맞대결을 하기도 하는데 왕자는 맞대결에서 주로 맞는 쪽이었다. 귀가 찢어지거나 이마에 상처를 입어 피를 줄줄 흘리고 다니는 경우를 몇 번 봤었는데, 동네 아주머니들 말로는 싸우는 데는 잼병 같다고. 녀석을 돌봐주시는 아주머니는 찢어진 부분에 연고를 발라 주시면서, 맞고만 다니지 말고 너도 주먹을 날리라고 애정 어린 주문을 하신다. 싸움에는 도통 소질이 없는 왕자의 난처한 입장도 이해가 갔다. 녀석은 아마도 상대방의 도전을 거절하고 그냥 도망가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나 덩치만 컸지 사실은 싸움 못해."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지도.


이렇듯 영역에 민감한 동물 중 하나가 고양이인데 희한하게도 왕자는 어린 고양이들 뿐만 아니라 배가 고픈 고양이들에게 자기 밥자리에서 밥을 먹게 해 주었다. 다른 아이들이 왕자가 자는 틈을 이용해 왕자의 밥을 사부작사부작 먹고 있노라면, 자고 있던 왕자가 벌떡 일어나 먹고 있는 녀석의 머리를 두툼한 앞발로 한 번 '쿵' 하고 내리찍은 다음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래서 왕자의 밥 자리에 이제 막 어미로부터 독립한 어린 고양이들과 밥자리가 없는 떠돌이 길고양이들이 이따금씩 찾아오면 왕자가 사는 빌라에 어김없이 안내문이 나붙었다.


더 이상의 고양이를 허용할 수 없으니, 빌라 유리문을 열어주지 마세요. 그렇게 불쌍하면 직접 데려가 키우세요. 불쌍한 고양이들이 왕자의 밥자리에 어슬렁 거리는 것을 본 주민들이 지나가다 빌라의 문을 열어 준 모양이었다. 이러다가는 동네 고양이들 급식소가 되겠다고 염려한 빌라 주민들이 써붙인 글이었다. 


그래, 왕자 한 마리 라도 자리를 내어주는 게 어딘가. 그 조차도 베풀지 못하는 것이 현실인데. 나 역시 그런 현실 앞에서 길고양이들을 위해 그다지 보탬이 되지 못했다. 직장을 다녔고, 피곤했으며,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다는 이유에서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캣맘들은 고양이들에게 헌신과 사랑을 베푼다.


중성화 수술을 끝낸 찡찡이는 한 동안은 왕자의 밥 자리로 와서 밥을 먹다 갔지만 빌라 사람들의 거부로 인해 이 동네 다른 빌라의 옥상을 전전하다가 그마나저도 여의치 않자, 갑자기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가끔 다른 영역으로 옮겨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규칙적으로 밥을 얻어먹을 수 있는 밥자리를 찾았거나(그렇다고 해도 기존 아이들이 신참을 받아줄 리 만무하다) 죽었거나. 좁은 골목길에서도 로드킬을 당하는 아이들이 있었고, 한 블록만 나가도 도로가 있어서 며칠 전에도 수컷 고양이 한 마리가 피투성이가 된 채 도로에 들러붙어 있었다 했다. 어디에 있더라도 찡찡이가 고통받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이때쯤 왕자와 완전히 안면을 트는 게 조금 두려웠다. 그동안 녀석에게 사료도 나누어 주고, 간식도 여러 번 사 먹였더니 녀석이 멀리서도 나를 알아보고 강아지처럼 달려오기 때문이었다. 내가 녀석을 키울 수 있을까 정말 여러 번 고민을 했었던 것 같다. 그 고민으로 동생과도 여러 번 대화를 했지만 늘 결론은 '불가능'에 마침표를 찍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아니 무거운 걸로는 부족해 발목에 모래주머니 달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SNS로 왕자의 입양 홍보를 몇 개월간 해보았으나 입양 문의는 전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 고양이라 할지라도 입양 가는 일은 흔치 않은 데다, 품종묘도, 미묘도 아닌 아닌 덩치 큰 수컷 고양이가 입양되는 일은 약간의 기적이 따라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밤에 간식 먹는 왕자와 찡찡이

왕자를 보는 것이 힘들어지다


그래서 나는 왕자를 점차 외면하게 되었다. 왕자를 보는 내 마음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왕자가 있는 빌라를 지나가지 않기 위해 일부러 먼 길을 돌아 집으로 왔고, 우연찮게 왕자를 보게 되더라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재빨리 걸어갔다. 왕자도 처음에는 나를 알아보는 듯하더니 나중에는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을 눈에 담으려고 하는 듯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번은 동네에서 다른 캣맘의 부탁으로 그분의 밥 자리에 대신 간식을 주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왕자가 나를 알아보고 졸졸 따라왔다. 12월의 추운 날씨여서 왕자를 겨울마다 집안에서 케어해 주시는 분이 계셨는데 그 집에 있어야 할 아이가 바깥으로 나와 있었다. 알고 보니, 겨울이라도 기온이 조금 올라가는 한낮에는 왕자가 나가게 해달라고 현관문을 긁어대는 통에 잠깐 외출을 허락해 준다고 했다. 그 틈에 나온 것인지 자기도 간식을 달라며 들이미는데 남의 밥자리까지 따라오는 이런 고양이는 처음 보았고, 이런 왕자의 들이밀고 보는 성격도 사람 같으면 정말 두고두고 싫어했을 테지만 왕자라서 측은하고 귀엽기까지 했다.


왕자를 보자 밥자리 주인인 고양이들이 순식간에 달아나버렸다. 남의 밥 자리까지 따라온 이 녀석을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다. 부탁받은 것들을 채워 넣고 서둘러 왕자를 데리고 나와 녀석이 좋아하는 츄르를 짜주었더니 꿀떡꿀떡 잘도 받아 삼켰다. 이 녀석은 길고양이가 아니라 꼭 어미 없는 고아 같았다. 잘 받아먹는 듯해서 돌아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니나 다를까 우리 집까지 쫓아왔다. 뒤를 잘 돌아봤어야 했는데...


녀석의 냄새가 바지에 묻으면 우리 집 1, 2호가 낯선 고양이의 냄새를 맡고 하악질을 해대며 못마땅해할 것이 뻔한데, 내가 이대로 우리 집으로 올라간다면 왕자도 따라서 올라올 것은 너무도 자명했다. 왕자라면 나를 따라와 오늘 당장 내 침대에서 잠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다시 녀석이 사는 빌라로 왕자를 유인해 왕자가 빌라로 들어가자 유리문을 닫아 주고 나왔다. 나에게 속은 녀석은 억울한 표정으로 멀뚱히 나를 보았는데 그 표정을 눈에 담지 않기 위해 서둘러 돌아섰다.


그것이 왕자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날 이후로 왕자를 멀리서 본 적은 있지만 계속 그 아이를 피해서 다녔고, 나도 다른 일로 바빠져 가끔은 왕자를 잊고 지내는 시간이 늘어갔다. 왕자가 잊히기도 했다가 기억 속에서 떠오르기도 했다가를 반복했지만 희미해져 간 것은 사실이었다.


왕자의 마지막은 알지 못한다. 듣지 못하기도 했고, 들을 용기도 없어서 물어보지도 못했다. 자연사였는지, 사고사였는지, 병으로 그리 된 것인지, 아이의 장례를 치러주었는지 아니면 생활폐기물로 분류해 처리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퇴근하던 어느 날 밤, 왕자가 자주 나와 있던 낮은 담벼락에 왕자의 죽음을 알리는 그곳 주민들의 안내문으로 왕자가 이곳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립다는 말로는 부족한 것. 그래도 그 말로 대신한다.


p.s 너희 둘이 이미 만났을지도 모르겠구나. 둘이 늘 같이 붙어 다녔잖아. 그때처럼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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