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동안 나를 괴롭힌 고통이 사라진 공허함
며칠 전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친구는 최근 나를 괴롭히는 건 무엇인지 물었다. 나는 한참을 생각했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이상했다. 예전의 나였다면 당장 열 손가락으로도 모자랄 이야기들이 줄줄 흘러나왔을 텐데.
이제는 없었다. 정말로, 없었다. 사람들이 처한 괴로움의 모양은 다 다르지만 그 원인은 비슷하다. 관계에서 오는 절망감, 경제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고통, 사랑받고 싶어 하는 인정욕구 등등. 나도 그냥 숨 쉬고 있는 사람인지라 비슷했다. 꼴만 달랐을 뿐, 특히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는 너무나 컸고, 그 욕망은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아서 품고 살기로 마음먹기도 했다.
15년 동안 한 회사에서 근무한 친구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이상했다. 조직 생활 없이 15년 동안 프리랜서로 살아온 내가 감히 친구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까? 친구는 15년 동안 일하면서 이제는 조직 생활에 적응이 돼서 그런지 기분 나쁜 일도 그러려니 넘긴다고 했다. 대한민국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이 한 둘일까? 꾹꾹 참고 사는 것이 아닌, 그것에 통달했을 때 나는 그것을 그분들의 수행이라 부르고 싶다. 꼭 종교나 영성적인 측면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일을 묵묵하게 해내고 이어나갈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런 사람이 수행자가 아닐까.
그런 측면에서 나는 매우 편한 근무환경에 놓여있다. 일 하기 싫은 날은 놀 수 있고, 스케줄도 조정이 가능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는 두 번 다시 협업을 하지 않겠다고 분노의 다짐을 하고 침을 삼키며 그렇게 되도록 행할 수 있는 주체성이 있다. 물론 돈에 관한 주체성이 있는 듯 없는 것이 이 일의 엄청난 흠이다. 많이 하면 할수록 결과로 나타나지만 그만큼 정신상태가 갈리고, 정신상태를 지키려면 덜 벌 수밖에 없으니 조직생활에서 일부 가능한 월급루팡은 꿈꾸기가 힘들다. 최근에 수행 연습을 하다 그런 질문이 문득 떠올랐다. 돈에 관해 큰 괴로움이 없는 나는 (많아서가 아니다, 원래 없어서 괴로움이 없다) 인간관계나 업무 환경에서 너무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그렇기에 가끔 겪는 관계 속 괴로움에서 유약한 멘털이 얼굴을 빼꼼 내민다. 나 여기 있어, 불렀어? 하면서..(응, 안 불렀어 꺼져 ㅠㅠ)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내가 가진 가장 큰 괴로움은 가족 안에서 나타났고, 그것이 해결되자 그 밖의 기타 등등의 다른 인간관계 문제는 거의 소멸되었다. 어느 날 화장실에서 봤던 ‘큰 것을 해결하면 작은 문제는 자동으로 해결된다.‘라는 기가 막힌 배변의 비유에 입꼬리를 올린 적이 있는데, 그 문구가 떠올랐다. 남편과의 문제가 해결되니 조직밖에서 생활하는 자잘한 문제들은 안개처럼 사라졌다. 앞이 안 보일 것처럼 희뿌연 것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이었다. 괴로움만 사라지면 좋은 줄 알았던 나는 38년 동안 나를 괴롭히던 그것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자 이제 어떤 방향으로 정진해야 하는지 목적을 잃어버렸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즈음에 4-5년에 한 번씩 걸릴법한 심한 감기를 앓게 되었다. 열이 펄펄 끓고 목소리는 쉬어서 자아가 세 명인 사람처럼 갈라져 나왔으며 후각은 완전히 상실했다. 그전까지 매일 새벽을 하며 100일을 마친 뒤였기 때문에 변화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리추얼과 건강한 습관들로 채워진 하루하루가 금세 무너지기 시작했고, 후각을 잃어버리니 자꾸 허한 마음이 들이닥치는 대로 음식을 입에 쑤셔 넣는 나를 발견했다.
그동안의 내가 했던 수행과 기도는 '괴로움이 없는 삶'이었다. 무엇인가 간절히 바라는 기복도 아니었고, 내 하루를 돌아보며 잘못한 일을 반성하고 다시는 그런 마음을 가지거나 행동하지 않겠다는 참회였다. 108배를 하며 입으로 발원문을 외울 때에도 무엇인가 하게 해 달라는 말이 아닌 내 무의식을 재설계하는 말들이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릴 때마다 커져서 터질 것 같던 내 에고는 점차 작아지고 소멸된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없어지고 나니까, 이제 정말 모르겠다. 텅 빈 방 안에 혼자 남겨진 느낌이었다. 불러도 누구 하나 오지 않는. 굳이 비유하자면, 괴로움에 인격이 있다면 나의 동반자였는데 떠난 느낌이랄까?
그 느낌이 참 좋으면서도, 외로웠다. 그래서 한참을 방황했다. 앞으로 내 수행은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인지. 즐거움도, 고통도 기꺼이 버릴 줄 알게 되었고 이분법의 틀에서도 벗어나서 인내하며 판단을 보류하는 삶을 살고 있다. 내가 담을 수 있는 언어의 그릇이 크지 않아서 이 느낌이 명확하게 부정적인지, 유쾌한지 무 자르듯 나누어 설명할 순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나는 괴로움이 없어진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예, 하느님 부처님. 이제 알겠어요. 진짜 무아 무엇인지, 진짜 무소유가 무엇인지. 그런데 그다음에는요?
니체는 이 개념은 '영원회귀'라는 희한한 말로 표현했다. 그 뜻을 대충 봤을 때는 굉장히 허무주의적인 것으로 해석 됐는데, 생각해 보니 지금 내 상태를 빗대어 그 표현을 빌릴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멈추면 나는 텅 빈 상태가 된 허무주의자가 될 것이고, 또 다른 새로운 가치를 찾게 되면 삶을 더 의미 있게 놀이처럼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고민했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매번 고민하고 고민했지만 결코 답을 내릴 수 없는 삶. 결국 내가 알코올 중독에서 빠져나온 뒤 삶을 다시 세우며 배운 것은 내가 필요한 곳에 적절하게 쓰이는 삶을 살자는 것이었다. 목적도 없이 그냥 살자는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흐르면서 유연하게 사는 삶. 그런데 거기에 또 하나가 추가되었다. 되도록이면 '사랑'의 가치를 담아 말과 글과 교육으로 나누는 삶.
며칠 전 유퀴즈에 이효리가 나온 것을 보고 감동했다. 그의 말 중에 마지막 말이 마음에 많이 남았다. 그동안 '받는 사랑'에 익숙해져서 그 사랑이 깨질 까봐 전전긍긍하고 불안해하며 살았던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다고. 그래서 결심했다고. 이제는 받는 사랑이 아니라 주는 사랑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받는 사랑은 상대방이 주지 않으면 끝나지만, 주는 사랑은 내가 지속하면 끝이 없기 때문이라고. 온갖 종교와 경전, 신들, 부처님과 보살님들이 했던 말도 같다. 바라는 것 없이 주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 매일 듣던 말이 다시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아직 후각이 돌아오진 않았다. 식욕도 왕성하고 덕분에 100일동안 108배를 하며 빠진 살이 다시 시나브로 올라와 턱 밑이 통통해졌다. 온전한 회복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을 꾼다. 알을 깨고 태어나는 작은 새를 봤고, 끝 없이 절벽에서 떨어지며 내 몸이 파괴되는 것을 봤다. 어릴 적 살던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을 꿨고, 그 과정이 녹록지않은 것을 보고 한탄하는 나를 느꼈다. 무의식은 나에게 계속 이야기하고 있다. 이제 과거의 너는 없다고. 새로운 너를 직면하라고. 아직은 그의 온전한 뜻을 알 수 없지만 어렴풋이 윤곽은 보인다.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야 할지.
그 마음을 먹으니 괴로움이 없는 텅 빈 내 마음도 다시 새싹이 돋아나듯 따뜻해지고 있다. 이 글을 쓴 시기의 나를 먼 훗날 돌아본다면 인생을 지나온 큰 변곡 점 중 하나의 이정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앞으로 내 삶에 펼쳐질 이야기들도 기대가 된다. 새로운 것들을 더 많이 창조해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