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를 다치고 요가를 쉬니 근손실이 오는데요?

득근한 근육은 원래 내 것이 아님을…

by 달달보름



마이솔을 호기롭게 시작한 지 한 달쯤 되던 어느 날.

겨드랑이 위, 어깨 바로 아래 딱 접히는 지점의 근육이 쑤시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무리를 하면 아팠던 어깨이기에 이러다 말겠지 하고 그 주에는 다른 주 보다 많이 총 3번의 수련을 진행했다. 아픈 줄 알면서도, 이제와 돌아보니 괜찮겠지 싶었던 과거의 나를 때리고 싶다. 부천 국제영화제를 즐기러 가서 영화를 보며 쑤시는 어깨를 부여잡았다. 깜깜하면 이상하게 더 아팠다. 트리거 포인트 (통증이 시작되는 지점)이 이두일 거라는 큰 착각을 안고 이두를 열심히 주물렀던 과거의 내 뺨을 후려치고 싶다.


통증이 시작된 게 언제였을까? 기억을 더듬어 보니 드문 드문 아팠던 경우는 꽤 많았고, 본격적으로 아팠던 것은 지난달부터였다. 몸살을 크게 앓으며 후각을 잃었고 동시에 뇌에서 전달되는 통각 신경회로가 끊긴 건지 그즈음에 몸이 아픈 것도 잘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날 마이솔을 마치고 인텐시브 하타를 하고 왔으니 당연히 탈이 나지.. 그런 줄도 모르고 핸즈온도 스트랩도 없이 에카 파다 라자카포다 (왕비둘기) 자세를 완성했다고 좋아했던 그런 과거의 내 머리채를 잡고 싶을 지경이다. 역시 할 수 있어요와 없어요의 경계는 매우 어렵고, 그 경계에서 어리석은 나는 엄살보다는 오버하기 쉬운 성향이라는 것을 이번 기회를 통해 깨달았다.


아마도 그날이었던 것 같다. 그동안 마일리지처럼 쌓였던 대미지가 폭발했던 순간.. 어두울 때 도드라지는 통증의 심각성을 인지한 나는 예약해 둔 마이솔을 취소하고 정형외과로 향했다. 평소 같으면 한의원을 찾았겠지만 이 통증을 침술로 없앤다는 것은 어림도 없을뿐더러, 엑스레이로 어떤 상태인지 확인을 해야만 속이 편할 것 같았다. 의사 선생님은 대면하자마자 밤에 통증 때문에 깬 적은 있는지 (밤엔 없고 영화관에서 있는데요라도 말하진 못했다), 팔을 위로 올릴 때 올리기가 힘든지 (위는 아니고 뒤로 뻗을 때 아프다는 말은 했다), 아픈 지 얼마나 됐는지 (한 달이라고 했지만 대미지 쌓인 진 꽤 됐다는 말은 못 했다) 등등을 물으셨다.


엑스레이를 찍고 나온 뒤 돌아온 답변은 ‘회전근개 염증 및 손상’이었다. 함께 요가하는 도반 언니가 파열 직전까지 가서 재생주사를 맞으며 괴로워하는 걸 분명 봤음에도 불구하고, 어깨 다친 아쉬탕기들을 수십 명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몸을 제대로 인지하고 쓴 것인가? 진짜 과거의 나 소환해서 묻고 싶었다. 대체 어떤 마음으로 어떤 수련을 한 거니…? 마음공부를 하면서 중도를 조금 알겠다고 한 나, 제대로 공부한 거 맞니? 선생님은 6주 동안 체외충격파 치료와 물리치료를 병행하라고 하셨다. 더럽게 비싸다. 6만 원이다. 게다가 일주일에 두 번씩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을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써야 한다. 아, 내 돈.. 내 시간… 아차차.. 지금이라도 알았으니까 러키비키쟈나 하고 위로를 해야 하는 건가..


무시무시하게 들여야 하는 돈과 시간보다 더 무시무시한 것은 6주 동안 마이솔을 비롯한 요가를 쉬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3년 동안 거의 일주일에 3-4번씩 요가하는 것을 빼먹은 적이 없고, 열심히 한 날은 하루 2-3타임을 수련하며 몸을 키워 왔는데 이걸 쉬어야 한다니. 처음엔 불안했다. 해야 하는 수련을 못해서 짜증이 나기도 했고, 괜히 몸이 무거워지는 느낌에 개운하지 않은 느낌도 들었다. 그런데 며칠 지나자 마음 상태를 바라볼 수 있었다. 불교대학에서 만난 한 도반님 말씀이 생각난다. ‘정진(108배와 명상)을하는 것도 수행이지만, 정진을 하지 않을 때의 마음을 살피는 것도 수행인 것 같다’라는 말씀. 도반님께서는 자기 위안처럼 들릴 수도 있다고 겸손하게 말씀하셨지만, 나는 요가 수련을 하지 않을 때 그 말이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마음 상태는 이렇게 변화했다. 짜증(루틴 상실과 체중증가와 근손실에 대한) -> 불쾌 (수련 후 개운하지 못한 느낌) -> 수용(어차피 못하니 마음 챙김이나 하자). 아! 이거 완전 퀴블러-로스의 죽음이나 상실을 경험하는 5단계랑 비슷하잖아. 결과적으로 수용을 했으니, 그럴 바엔 마음을 더 살피자는 다짐이었다. 가장 두려운 것은 요가를 하지 않음에서 오는 공허함이었다. 그동안 루틴처럼 채워졌던 행위를 하지 않을 때의 마음은 내가 요가에 얼마나 ‘집착’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수행과 거리가 먼 마음이었다. 두 번째 오는 두려움은 체중증가와 근손실이다. 힘든 요가를 하며 3kg의 득근을 했기 때문인지 이것을 잃는 것은 내 ‘노오력’을 잃는 행위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뒤통수를 아주 제대로 맞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불교 경전인 숫타니파다를 읽으면서이다.


무엇인가를 내 것이라고 생각하며

집착하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의 모습은 물이 말라 가는 개울에서

허덕이는 물고기와 같다.

그 꼴을 보고 ‘내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여러 가지 생존에 대해

집착을 버려야 한다.


나는 항상 입버릇처럼 무엇인가에 큰 집착과 소유가 없다는 선비 같은 말을 하곤 했다. 그런데 진짜 그런가? 내 몸에 대한 소유욕도 그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원래 없던 빼빼한 몸에 노오력으로 근육 좀 채워 넣었다고 그 육체가 본래 내 것이라고 착각하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 육신을 떠나고 나면 어차피 다 없어지고 소멸될 것을 나는 3년을 수련하면서 오히려 더 깊게 집착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한혜진의 다이어트에 대한 명언이 떠오른다. ‘몸은 정직하다. 노력하는 것 만큼 보여준다.’ 이 말은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신화처럼 적용되는 듯하다. 그 말이 절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정직한 몸 때문에 사람의 마음이 몸에 집착하기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 좀 더 거시적인 사회 관점으로 바라보면 몸이라는 것은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보여주기 가장 쉬운 노력의 산물 같기도 하다. 시간과 여유가 있어야만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없다고 해도 충분한 노력으로 극적인 비포 애프터는 어느 정도 만들 수 있으니까 말이다.



요가를 쉰 지 13일이 지났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깊은 이완에 집중할 수 있는 인요가와 스트레칭뿐이다. 그것도 어깨는 많이 쓰지 못하고 하체 위주의 스트레칭만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시간 속에 나는 3년 동안 요가로 깨달았다고 착각한 진짜 이완과 쉼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이 시간이 고맙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 느끼지 못했을, 오히려 반대인 집착으로 향하기 쉬웠을 내 마음을 다시 잡아 중심으로 돌아오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고요해졌다. 또 다른 집착이 남아있을지 모르겠지만, 몸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으니 명상을 더 깊게 하고 싶어졌다. 10-20분 하던 명상 수련 시간을 늘렸고, 내달에는 4박 5일간 집중적으로 명상수련을 하는 프로그램에도 신청해 놓았다.



요가를 왜 하는가에 대한 근본 질문을 스스로 던져 본다. 평화롭고 싶어서, 경쟁상황에서 흔들리지 않고 싶어서, 나를 알고 싶어서. 이런 답의 끝에 결론을 내렸다. 평생 ‘인요가’, ’ 힐링 요가‘와 같은 평범한 요가만 하면서도 충분히 그 답들을 얻을 수 있다는 것. SNS에 올릴만한 화려한 아사나가 아니어도 충분한 수련을 할 수 있다는 것. 그 느리고 긴 호흡 속 쉽고 편안한 동작이 내 요기니 생활을 더 오래도록 연장시켜 줄 수 있다는 것.



욕심쟁이 요기니는 이렇게 부상으로 또 한 번 나를 돌아보고 내려놓게 되었다. 아프지 않고 깨닫게 된다면 참 좋을 텐데, 인간이란….





매거진의 이전글할 수 '있어요'와 '없어요'의 사이